믿는자의 심장엔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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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아가는데는 여러가지 필요한 덕목들이 있습니다.

지혜도 필요하고 지식도 필요하고 체력도 필요하고 좋은 인간관계도 필요합니다. 머리도 좋아야 하고 인물이 받쳐주면 더 좋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가졌다 해도 한가지가 빠지면 이 모든것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강철과 같이 굳은 의지 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 내가 이것만은 하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머리가 비상하고 출신이 훌륭하고 인물이 훌륭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잘 해야 남이 시키는 일들만 해내며 일생을 그저 그렇게 살다가 사라지게 됩니다.

의지는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구별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지능이 높은 짐승이 있어도 짐승들은 본능을 따라 살아가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본능을 이겨내는 의지를 따라 살아가는 짐승은 없습니다.

인간에게도 본능이 있습니다. 식욕과 성욕으로 대표되는 이 본능을 정상적인 인간들은 제어하고 통제 할 주 압니다. 그것도 못하는 인간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 의지는 그저 자신의 본능이나 다스리라고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이 의지를 사용해서 좀더 고상하고 또 고차원적인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예술을 위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의 실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가며 노력 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하지만 아무나 이런 희생을 무릎쓰고 이상을 위해 자신의 의지를 사용 할 수 있는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편안을 보장 해 주는 이익을 쫓아가지 이런 이상의 실현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인간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자신들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무엇인가 의미있는 일들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특별한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특별한 의무감, 나는 이것을 해야만 한다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리켜 우리는 콜링이라고 부릅니다.

콜링을 받은 사람들의 이면에는 자신이 이것을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과 동시에 내가 하는 이 일은 정말로 선한 것이며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인 것이 세상의 어떤 인간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선하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일을 위해 자신의 귀한 시간과 능력과 재능을 낭비 하겠습니까?

정리하자면 인간은 만약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정말로 선하고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강력한 의지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고도 감당할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고행을 하고 어떤사람들은 속세와의 연을 끊고 산으로 들어가서 수련을 하고 도를 닦고 그 궁극적 가치를 위해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자신이 모든것을 바쳐 희생하고도 지키기 위해 혹은 도달하기 위해 노력할 만한 중요한 가치가 있는데 게다가 그것이 나에게 무한한 이익을 가져다 주는 유일한 것이라면 어떠시겠습니까? 그리고 또 이렇게 좋은것이 나에게 단순한 산술적익 이익만을 주는것이 아니라 아예 인생을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고 기쁨과 충만함이 넘치게 하는 것이라면 어떠시겠습니까? 그런 것이 있다면 어떠시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중요한 가치와 정의라는 것들은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합니다.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고 우리의 전력을 쏟기를 종용하지만 그리나 일견 의미가 있어 보였던 그 높은 이상도 그 종국은 결국 허무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쫓아가는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되어줄 뿐 아니라 우리가 이를 위해 따라가는 믿음의 여정위에도 기쁨과 충만함의 선물을 넘치도록 부어 줍니다, 그 따라가는 길의 어려움이 종국과 시동으로 우리가 얻는 기쁨과 충만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것이 되어 버리게 합니다.

바로 그 충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 요한복음 7:37절로 44절 까지의 말씀 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초막절 유대인의 명절 중간에 올라가셔서 말씀을 강론하시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는것과 또 그리스도가 출현할 때 아무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를것이라는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예언자의 입을 통해 전해진것도 아닌 자신들의 상상을 근거로 주님을 모함하는 것을 겪게 되십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하시면서 주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아무리 메시아를 찾고 기다려도 이미 오신 메시아를 알아 보지 못 하고 박해하는 눈 뜬 장님과 같은 그들은 기다리는 메시아를 절대로 만날 수 없음을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의 거짓된 기대감 자신들이 만들어 낸 메시아의 헛된 기준이 자신들이 정말로 기다리던 메시아 곧 우리 주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게 되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장면이 전환되어 오늘 초막절의 마지막에 주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의 말씀은 사실 주님께서 지난번에 자신을 말도 안되는 자신들의 상상의 기준으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재단하던 유대인들의 잘못된 믿음에 대한 주님께서 말씀 하시는 진리에 대한 선포의 성격이 있습니다.

왜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인가는 초막절의 마지막날을 좀 더 깊게 살펴보시게 되면 분명하게 드러 나게 됩니다.

초막절의 마지막 날에 유대인들은 베세다 연못에서 물을 길어와 그 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의식을 드렸습니다. 이 의식 역시 성서적인 근거가 있는 의식은 아니고 예수님의 성육신 약 이백년 전 가량부터 유대인들에게 나타난 새로운 의식 이었습니다.

물론 이 의식이 이방인의 의식을 차용했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저 사람들이 좋아하는 보기에 성스러워 보여 좋고, 참여 하기 좋은, 물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그런 의식이었습니다.

물이 가지는 성스런 이미지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참여하신 세례와 같이 물에는 정결케 하는 의미와 그런 능력이 있는것으로 성경은 적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부정한 자들에게 물로 씻는 것을 요구하는 율법이 있었고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친 것도 물에 자신의 몸을 담근 후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이런 유대인들의 모습이 매우 답답해 보였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시면 살아있는 말씀 생명의 근원인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 자신들 눈 앞에 있는데 고작 베세다 샘물에서 물이나 길러다 하나님앞에 바친다고 하면서 성경에도 없는 제례를 드리면서 좋아라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얼마나 답답 했겠습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의 물과 정말로 살아 있는 생수의 강을 대비시키시면서 오늘의 말씀 즉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온갖 정성을 들여서 시간을 들이고 물질을 들이고 노동력을 들여서 준비하는 일종의 정결례인 이 물의 의식과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 가운데 솟아 나는 생수의 강을 극명하게 대조하시면서 세상이 주는 위안과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생명의 기쁨을 비교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작 샘물에서 길러다 제단 옆에 뿌리는 초막절의 물의 예식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생명수의 강이 넘쳐 흐르는 진정한 은혜와 축복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초막절에 유대인들이 드리고 있던 물의 예식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은혜와 얼마나 상반된 것인지 비교를 해 주십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주실 생수의 강이 성경에 나온 적혀 있는 대로 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것은 이사야서의 말씀이나 요엘서나 출애굽에 나온 구절들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주님께서 인간들이 흉내낸 예식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고 예언하시고 준비하신 크신 선물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의 충만을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4장3절은 이러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이사야 55장1절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에스겔 47장 1절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스가랴 14장8절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그리고 이런 생수의 강 은혜의 넘치고 넘침은 누구에게 허락 되는지 말씀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나를 믿는자!’ 바로 오직 믿는자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만 허락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 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런 은혜를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함니까? 우리가 치뤄야 할 희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치룰 값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사야 서 55장 1절 말씀과 같이 ‘값없이’ 산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치룰 값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서 겪는 모든 문제들 가운데 나의 어려움가운데 칠흑같은 어둠을 걷는것 같은 절망의 길을 걷고 있을 지라도 다윗의 고백과 같이 내가 사망의 골짜기를 걷고 있은것 같을 지라도 우리 주님을 믿으면 우리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쳐 죽어 가는 내 생을 살리고 나의 멀어 가는 눈을 밝게 하시고 나의 막혀가는 귀를 뚫어 주시며 굳어 버린 무릎에 힘을 넣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깜깜한 인생에 빛이 비추고 향기가 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핵심 구절인 38절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배는 원어로 κοιλία – 코일리아 입니다 그런데 알아두면 좋은 것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 하시던 이 시대 이 κοιλία – 코일리아는 심장을 뜻하는 καρδία – 카르디아와 혼용해서 심장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여기서 말씀하시는 배는 우리의 심장 곧 우리ㅏ의 영혼이 머무는, 우리의 속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가득차게 된다는 것은 바로 나의 죽어가는 속 사람, 죄에 무너져 버리고 세상에 패배해 힘이 빠지고 허물어진 나의 속 사람이 일어서고 뛰어 다니고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안에 거하게 되는 그런 기각막힌 충만을 표현 하시는 말씀 인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습니다. 세상은 알 수도 없고 줄 수는 더더욱 없는 하나님의 충만을 우리 주님께서는 생수의 강이 우리의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것으로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 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자들에게는 우리 미든 자들의 심장에는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 충만의 축복입니다. 죽음도 빼았아 가지 못하는 그 기가 막히는 축복의 한 가운데로 우리 주님꼐서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사야 서의 말씀대로 목이 마른자, 속 사람이 죽어 가는 자, 말라 비틀어진 광야의 갈라진 땅처럼 괴로운 자들 살 힘조차 잃어버린 사람들 패배한 자들 실패 한 자들 다 주님 앞에 나아 오십시오, 목마른 자가 마실 때가 이르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어 주실 그 생명의 강, 세상의 거짓되고 음란한 썩어버린 죽음의 잔이 아니라 은혜와 영과으로 빛나며 우리의 빈 가슴을 채워 사슴처럼 뛰어놀게 할 성령의 충만을 받으십시오,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7: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7: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7:41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7:43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7: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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