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자의 심장엔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고 II

ירושלים_העיר_העתיקה_מבט_מדרום

 

내로남불이라는 신생어가 있습니다.

내가하면 로맨스고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어제는 반대하던 일을 오늘 내가 하게 되면 찬성하는 손 바닥 뒤집듯 판단을 뒤집는 행태, 삶의 기준이 너무 쉽게 바뀌는 태도를 이야기 하는데요, 당하는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건 기본이고 옆에서 지켜만 봐도 열불이 나게하는 아주 비열한 삶의 태도입니다.

이를테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홍모 감독이 영화를 찍다가 젊은 여배우와 바람이 나서 가정을 깨고 누가봐도 불륜인 자신의 행동을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하려고 했을 때 우리가 기가막혀 한 것을 생각해 보면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태도의 근본에는 자신은 남들보다 더 높고 옳고 더 훌륭하기 때문에 자신은 어떤일을 해도 괜찮다는 교만한 생각이 있습니다. 자신의 아내가 자신의 자식이 어떻게 느낄지는 안중에도 없는 방자함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에 전혀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무책임함이 이런 행동의 뒤에는 있습니다.

이런 태도를 아직 미숙한 어린아이들이 보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회를 이끌어 가고 큰 책임을 지고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자기 편한대로 그것도 언제나 자기 중심으로 이 때는 이렇게 변하고 저 때는 이렇게 변하는 기준을 만들어 내고 결국 그런 말도 안되는 기준이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태도를 종교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다면?

오늘의 본문에는 바로 이런 모습의 유대인 지도자들과 또 이런 지도자들 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눈을 떠 가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나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요한 복음 7장 45절로 53절 까지의 말씀입니다.

요한 복음은 매우 시각적인 묘사가 두드러지는 복음서 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의 지역들과 지형에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다면 요한복음에서는 공간적인 이동이 주제에 따라 잘 변화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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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자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야밤에 찾아와서 거듭남에 대하여 물어보는 배경이 되는 예수님의 숙소는, 누가복음 21장 37절을 참고하면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하신 말씀 처럼, 감람산 즉 예루살렘과 성전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감람산에서 깜깜한 밤처럼 영적인 어두움이 감싸고 있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내려다보는 그런 곳에서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곳에서 구원의 의미 거듭남의 의미를 깨닫지 못해 주님께 물어 보고 있던 이스라엘의 스승 니고데모의 영적인 무지함은 깜깜한 밤의 적막에 싸여 있던 예루살렘의 모습과 정확하게 오버랩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공간적 배경에 따라 진행되는 사건의 톤과 느낌이 달라지는 것은  요한복음 7장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유대인 지도자들과 변론을 하시던 성전뜰에서의 사건과 오늘의 배경이 되고 있는 제사장들과 바리새파들의 공간인 이곳에서의 사건의 느낌과 톤이 다릅니다.

먼저 성전 뜰에서 강론하시던 우리 주님에 대해 유대인 지도자들이 어떻게 대했는가는 성경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7:26 보라 …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이 말씀은 유대인 지도자들 즉 제사장들 무리와 바리새 파 등이 자신들이 잡아 죽이려 하던 예수님이 눈 앞에 있음에도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관망만 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사실은 그들이 주님께서 다시 성전에 오실것에 대해 대비가 없었음과 그들이 주님께 무슨 해를 공개적으로는 가할 수 없을 정도로 백성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인지도가 높아져 있음을 이야기 합니다.

공적인 공간인 성전 뜰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백성들 때문에 그들앞에서 자신들이 정말 원하는 바 예수님을 잡는 것을 말하지도 못하고 더더욱 행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적인 공간에서 예수님을 가운데에 놓고 이런 생각과 저런 생각이 부딛히는 가운데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힘이 점점 자라고 있는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사건이 배경이 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공간에서는 이제 유대인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속 마음을 마음껏 쏟아 놓습니다. 자신들 끼리 거칠것이 없습니다.

먼저 이들은 자신들의 아랫사람 성전경비들로 생각 되는 사람들에게 일갈을 가합니다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믈론 여기서 말하는 잡아와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아랫사람들 성전 경비원들은 예수님을 잡아 오지 않았습니다. 군인으로 치면 항명을 한 셈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 까 생각해 보려면 이들 성전 경비들이 누군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레위 족속으로 제사장이 되기에는 혈통이 부족하거나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경비를 맡게 되었고 나중에는 결국 주님을 체포해 가는 자들과 사도들을 체포해 갔던 사람들이 바로 이 레위인 성전 경비원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어찌됬든 레위인 즉 제사장 가문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율법에 대한 헌신이 매우 컸을 것임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왜 예수를 잡아오지 않았냐는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대답에 이렇게 항면 합니다.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이 대답은 그저 성전을 경호하던 경비로써의 대답이 아니라 제사장 혈통 레위인으로의 대답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들이 율법도 알고 말씀도 알고 또 미드라쉬도 유댕의 신학적 문학적 전통도 알고 다 아는데 우리가 이때껏 살면서 이런 권위있는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항변인것입니다. 너희들이 강론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런 사람을 잡아오라는 것이냐? 무슨 죄가 있다는 것이냐? 하는 항변인 것입니다.

그런 그 들의 대답에 바리새 인들과 제사장 들은 너희도 미혹 되었느냐? 하고 응수 합니다. 한 마디로 너희가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권위가 있는것이 아니라 미혹하는 가르침 속이는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증거나 근거도 없이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가르치심을 매도할 수는 없는것 그래서 그들은 두 가지 근거를 듭니다. 7장 48절과 49절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즉 그들이 들은 근거는 두 가지로 첫 째는 당국자 즉 귀족 세력들을 이야기 하고 그리고 바리새인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가 있는냐는 것입니다. 두 째로는 당국자나 바리새인과는 다르게 일반인들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미혹되는 일반인들은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미혹되어 저주 받은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 즉 율법을 아는 정통한 자신들은 절대로 믿지 않을 이런 갈릴리 출신의 예수의 가르침을 믿는것은 이 자들이 율법을 모르는 무지한 자들 어리석은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정말 교만한 자기 확신에 의한 선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 그럴듯한 이 두가지 근거는 이후 니고데모에 의해 모든것이 반박 되어 집니다.

먼저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습니다. 게다가 바리새인이었고 그리고 유대의 스승으로 율법에 정통한 랍비였습니다. 그가 직접 이들의 주장에 제동을 겁니다 7장5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이 이야기는 신명기 말씀의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하신 말씀과 여러 다른 말씀에서 정하고 있는 율법의 기본 즉 증인과 증거가 없을 때에는 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정신을 들어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옳지 못하다는 유대의 스승으로 율법학자로 당연한 지적을 한 것입니다.

당연히 니고데모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랍비로 받들며 또한 구원의 비밀을 가지신 분으로 알고 믿었지만 그런 이유로 편을 든것이 아니라 바로 율법이 적고 있는 그대로 한 사람을 처벌 하고자 하면 증거를 통해 증인을 통해 재판을 해야 하고 거기에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유대의 랍비로 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러자 이런 당연하고 그야말로 율법적인 지적에 이 유대인 지도자들 바리새인들이 무엇이라 반박하는 가 보면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이 말은 갈리리에서는 예수님 이전에는 선지자가 없었다는 이야기로 일면 맞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또 갈릴리를 두고 성경은 어떠한 예언도 한 바가 없고 특히나 메시아와 연관해서는 아무런 예언이 없다는 점에서 이들이 하는 말이 어떤 의미가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법을 어긴 증거가 된 다는 말입니까? 율법을 어겼다면 그 어긴 법이 있어야 하고 그 말을 들은 증인들이 있어야 하고 또 상황에 비추어 보아 정말로 법을 어겼다는 사람의 의중이 법을 어기려는 의중이 있었어야 위법으로 처벌을 할 수 있는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 절차와 정신을 구약의 법들에서 너무나 정확하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주님께서는 자신의 입으로는 자신이 메시아라 칭하시는 바가 없었으니 무슨 법을 도무지 어겼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지금 증거가 있어서 주님을 처벌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곧 자신들의 주님으로 받아 들일수 없기 때문에 처벌 하겠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힘으로 자신들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처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이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조들에게 직접 주신 율법일지라도 자신들이 원하는 바가 아닌 이야기를 하면 지킬 의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작금의 동성애를 두고 있어온 많은 신학 논쟁과 너무 비슷합니다.

세상이 변했기 때문에 교회도 변해야 한다면서 얼마나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성경에 분명히 적혀있는 죄인 동성애를 옹호해 왔습니까? 또 분명한 생명을 죽이는 살인의 행위인 낙태를 허용하는 이야기들을 해 왔습니까? 성경 어디에 애기를 죽이는 것은 괜찮다고  적혀 있으며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아니면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교제를 허락하거나 결혼을 허락 할 근거가 있습니까?

성경은 전혀 허락하고 있지 않음에도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세상이 바꼈기 때문에 교회도 성경의 해석도 그러해야 한다며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들을 옹호하고 있었습니까? 그리고 그러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성경 말씀을 비틀어 해석하면서 자신들이야 말로 정확하고 시대에 맞게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것이라 거짓 주장을 해 대고 있습니까?

다만 본문을 보면서 놀라는것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법이 자기맘과 맞지않을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지 않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호하고 치장하려 하는것이 지금이나 이천년전이나 같았구나 하는 사실에 놀랄 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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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렇게 인간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악하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막지는 못합니다. 지금 당장 본문에 드러나는 니고데모에게 하나님께서 지혜와 용기로 임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그는 비록 혼자였어도 다수에 맞서 진리인 율법을 일깨워주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공격 당하고 모욕을 당했어도 끝까지 주님 곁에 맴돌다 결국 주님의 장례를 맡아 치루는 영광까지 얻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비록 성전의 경비나 서고 있지만 제사장의 핏줄인 성전 경비원들은 훨씬 더 담대하게 이렇게 권위있는 말씀은 들어 보지도 못했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에게 어떻게 손을 대냐며 어찌보면 유대인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대들기까지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성전 밖에서는 지금 자신들의 공간에서는 주님을 죽인 계략을 꾸미는 이들도 입도 뻥끗하지 못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전하신 복음에 반응하여 점점 더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어쩌면 교회를 지키는 것은 철학적 신학적으로 성경을 파헤치는 머리 큰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에 목 말라 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길 사모하는 기도 오래하시고 깊게 하시는 우리 권사님 들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이런분들이야말로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성전의 경비를 서는 제사장 지파 레위인들일것이라고 믿습니다.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고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넓고 깊고 높음을 깨달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에 힘쓰는 이런 분들이야 말로 교회를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분들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세상 누구보다 자세하게 알고 또 그를 통해 판단을 하고 판결을 해 왔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더이상 필요한 것이 없고 자신들 보기에 충분히 훌륭한 교만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누리기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일지라도 거역할 반역의 피 그리고 살인자인 카인의 피가 흐르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시 말씀 드리지만  세상이 이렇게 미쳐 돌아갈 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심장에는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고 세상 어느것도 주지 못한 기쁨과 만족을 주님을 통해 얻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내 뜻보다도 먼저 행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인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목숨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더 귀한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핍박받으실 때도 그랬고 세상이 음란과 폭력으로 미쳐 돌아가는 현대에도 진리입니다. 오직 주님께 받은 은혜로 받은 그 믿음으로 생수의 강이 심장에 넘치도록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자들이 넘치도록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암울하고 전쟁의 소문은 그칠날이 없으며 음란과 폭력은 언제나 세상을 지배하는 듯 해도 오직 주의 이름을 믿는 자들만이 진리를 선포 할 것이며 그들의 심장에 터져 나오는 생수의 강이 세상을 덮고 세상을 바꾸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7:45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7:46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7: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7: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7: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7:50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7: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7: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7: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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