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가려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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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다녀 갔습니다. 일박이일의 짧은 일정가운데 가장 주목 받은 순간은 트럼프 대통령이 국회에서 연설을 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연설을 한국의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와 특히나 한국전쟁을 통해 맺어진 두 나라간의 특별한 관계를 도저히 외국인이 써온 연설문이라고는 밎어지지 않을 정도의 대한민국과 대한국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심지어 북한의 백성들에 대한 연민을 보여주는 연설을 해서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놀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방한 이전의 인상은 특히나 한국국민들에게는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틈만나면 전쟁으로 위협하는 살짝 사고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타는 연예인 출신 극우 꼴통의 이미지 정도가 그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 일것입니다. 심지어는 한국의 외무부 장관이라는 여자도 어느 한 프로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살짝 이상하지 않더냐는 사회자의 질문을 웃음으로 긍정하고 넘어갈 정도 였으니 한국민들이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상당히 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렁데 이러는 것도 무리가 아닌것이 한국의 언론들이 보도해대던 트럼프 대통령이 딱 그렇게 정상인과 광인의 중간정도 였기 때문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사진도 진짜 어디서 구했는지 꿈에 볼까 무서운 사나운 인상으로 찍힌 사진만 쓴다던지 하면서 실제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통찰력같은것은 전혀 한국사람들에게 보도도 되지 않았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때 제시한 다시 위대한 미국을 건설하기 위한 17가지 국정 최우선 과제는 세계의 모든 지도자들이 귀담아 들을만한 혜안이 녹아있는 문제제시와 해결책들의 모음이었지만 언론에서는 그저 멕시코의 불법이민자를 막기위해 세우겠다는 벽에 대한 이야기만 우습게 떠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저 저같은 일반인들이 이런 정도의 식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그러려니 하겠지만 유수의 언론사들이 과연 수준이 안되서 트럼프라는 탁월한 개인의 역사적인 중요성을 몰라서 이렇게 악의적인 보도를 해 댔을까요? 그러니까 정말 트럼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우스꽝 스럽고 위험해 보이도록 보도를 했을까? 하는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것은 아닌것 같다입니다. 몰라서 그렇게 보도했다기 보다는 적어도 보도의 흐름을 결정할 만한 사람들은 트럼프가 어떤 사람이고 정말 미국의 대통령이 될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트럼프에대한 보도를 악의적으로 했을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트럼프가 훌륭한 사람이고 또 미국의 대통령이 될 만한 가능성이 큰 사람이란것을 알아도 기필코 이사람을 광인에 가깝게 그리고 제 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묘사해야만 할 이유가 있어서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

제가 왜 그렇게 생각 하는가 하면 뜬금없이 들릴 수 있지만 우리 나라의 언론들과 사회가 요 십년간 급격하게 선진화되는 동시에 한국말로하면 진보적인 성향이 강해졌고 미국식으로하면 리버럴해졌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우리나라의 간통죄 폐지와 동성애 퍼레이드등이 나타내는 사회 문화적 지표가 매우 급전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예들 뿐 아니라 아침드라마를 대표하는 막장드라마들, 사랑하는 여인이 알고보니 어려서 입양보냈던 잃어버린 여동생이었고, 등등으로 대표되는 그야말로 막장의 끝을 보여주는, 예전에는 방영이 문제가 아니라 입에 담는것도 끔찍한 이야기들이 방송을 타는것만 봐도 대한민국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기존의 윤리를 해체하고 새로운 포스트모던 문화속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 있을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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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국민들은 전통적인 관점에서 윤리적인 삶을 살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들이 즐기는 문화를 만들어내는 그리고 선도하는 매스미디어와 언론과 사회 엘리트라는 계층의 윤리적 도덕적 해체 수준은 매우 심각하다라는 것이죠. 홍상수라는 감독을 기억해 보시면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과 식사를 하다말고 자신은 이제 사랑하는 애인에게로 갈 테니 이해하고 너희들 잘 살아라 선포하는것이 얼마나 끝내주게 21세기적이고 해체적입니까?

그러니까 이런 엘리트 계층들이 장악한 언론들은, 좌파던 우파던 할 것없이, 기존의 가치의 회복을 주장하고 국경의 회복을 주장하고 또 힘에 의한 세계질서유지를 신봉하는 합리적이고 또 경제적이며 윤리적인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는 게다가 자신은 완전하지 않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을 믿노라며 성경적 가치관을 따르노라 선언하는 새로운 세계의 지도자를 반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트럼프와 대척점에 서있던 힐러리를 얼마나 언론들이 극찬하고 미사여구로 포장을 했는지 생각해 보시고 과연 힐러리가 대표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면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더 이해가 쉽게 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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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는 낙태를 찬성하고 성경이 말하는 종교적 양심을 수호할 의지가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전통적 결혼관을 지지하지 않고 심지어는 급진적 이슬람들에게 지원을 받아왔으며 이슬람 난민들에 대해 더욱더 미국의 국경을 열어 개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힐러리가 같이 교제하던 예술인들의 면면을 살펴 보면 사탄숭배의식을 짐승의 피로 재현한것을 스피릿 쿡킹이라는 새로운 행위예술로 설명하던 마리나 아브라모빅 같은 사람도 있는것을 보면 얼마나 이들 힐러리로 대표되는 엘리트라는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정상과는 거리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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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릿쿡킹-마리아 아브라모빅

 

결국 우리 나라의 언론들도 이와같은 미국의 엘리트들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 몰라도 비슷하게 도덕적인 해체와 사고의 전환을 겪은것이 아닐까 저는 짐작합니다. 홍상수처럼 말입니다 아니면 검찰 총장을 역임했지만 혼외자 아들이 있어서 낙마한 채동욱 전 검찰총장, 파도파도 미담만 나온다고 파도미라던 그 사람이 꾸리고 있던 정말 해체적인 두집살림 가족의 모습이 증언하는 모습이 바로 이런 힐러리와 같은 엘리트들의 삶의 지평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생각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트럼프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가치관과 힐러리나 홍상수같은 사람들로 대표되는 일명 진보적이고 해체적인 21세기적인 포스트모던 사고와의 충돌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곳이 전세계 엘리트 언론의 트럼프에 대한 공격이었고 보수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미국의 유권자들의 소셜미디어를 통한 기존 엘리트 언론과의 대충돌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트 언론들이 트럼프에게 씌우던 이런 프레임들이 아무리 정교하고 견고해도 어떻습니까? 트럼프 대통령의 국회에서의 연설 한번으로 다 무너져내리고 있지 않습니까?  몇몇 정말 극단적인 좌익들을 제외 하고는 트럼프가 보여준 높고 깊은 식견에 감탄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진실 그리고 진리는 가려질 수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인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트럼프 대통령이야기를 한것은 이천년전에 트럼프 대통령이 받은 공격은 저리가라로 공격 받으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다 알만한 식견의 지도자들에 공격받으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말씀하시던 것은 명명백백한 진리요 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공격 당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그 분을 좀 더 알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공격을 받으셨던 분은 바로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오늘의 본문은 요한복음 8장 21절로 30절까지의 말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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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님과 바리세 파 사람과의 논쟁을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늘 발견되는데 그것은 어제나 바리새 파 사람들은 우리 주님이 어떤사람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것으로 그려진다는 것입니다. 무지렁이 백성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다린 메시아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고 따라가려 하는데 말입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저는 바리새 파나 유대인 서기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어려워서 못 알아 들었거나 혹은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증거가 부족해서 못 알아 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정말로 극도록 정교하고 방대한 말씀, 문학, 철학과 법의 훈련을 받아온 이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이 기다린다고 이야기 해 온 구세주이심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단지 이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음을 들어보고는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고의로 부정하고 왜곡하고 모함을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강한 증거를 보여주는 여러 말씀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 드리는 이유는 오늘 주님께서 직접 밝히신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밝히신 당신께서 누구인가 하는 그 말씀이 너무나 정확하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씀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특히나 성경에 훈련이 되어있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라면 절대 오해할 수 없을 말씀을 하시는데 바리새인들이 알아듣고도 못 알아 듣는척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듣기 위해 예수님을 다시금 유도 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데 문제가 있는것이 현대의 한국인들 그리고 또 구약의 말씀을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훈련 받지 못한 우리는 사실 주님께서 지금 얼마나 대단한 선포를 하시는지 도저히 알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알아들을 자들에게는 그들의 수준에 맞게 하셔야 할 말씀의 난이도?를 기가 막히게 조정하시는 눈높이 설교자였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에서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 기준을 맞추신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기 일 수 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표현하는 특히 구약에서 말씀 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야훼, 아도나이, 엘로힘, 엘샤다이 등으로 구분하기에 따라 스물여섯가지로 표현될 정도로 다양 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 이름들은 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서술하는 설명이지 진짜 이름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엘로힘 – אֱלֹהִים 을 보면 이이름은 신이라는 뜻의 엘의 복수형 즉 신들이라는 뜻의 단어인데 하나님을 지칭 할 때는 신중의 신이라는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엘샤다이- אֵל שַׁדַּי‎‎ 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엘 – אֵל 과 아마도 파괴하다의 뜻으로 짐작되는 샤다이 – שַׁדַּי 가 합쳐져 전능자 하나님을 뜻하는 이름으로 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위의 두 예에서도 이미 알 수 있듯이 이 하나님의 이름들은 하나님을 수식하고 설명하는 말이지 이름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이 바로 우리가 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해하는 야훼라는 이름입니다. 야훼라는 이름은  그런데 읽을 수 없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읽으라고 만든 이름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은 인간이 입에 담을 수 없는 거룩하고 경건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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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יהוה 로 표현 합니다. 그런데 이 네자는 모두 자음입니다. 한국말로 예를들자면 ㅎㄴㄴ 같은식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다른 단어들과 달리 이 이름은 읽는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것이 아닙니다. 야훼라는 이름도 학자들이 이 네글자를 읽는다면 이렇게 발음이 날것이다라는 상상으로 읽어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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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읽을 때 이 네글자가 나오면 유일하신 하나님, 하나님께 영광 이라고 하던지 그 이름이라고 말을 하던지 아니면 아도나이, 주님이라고 읽으며 하나님께 절을 하며 성경을 읽어 갔던 것입니다.

즉 너무나 거룩해서 입으로는 담을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이름이 바로 이 네글자 יהוה 인것입니다. 그래서 이 네글자를 뜻하는 다른말이 테트라그라마톤 – Τετραγράμματον입니다. 네글자라는 뜻의 이단어는 하나님의 이름을 뜻하는 거룩한 네글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게 거룩하게 생각한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인간은 알수도 볼수도 읽을수도 들을수도 없는 거룩한 이름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인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다른 인간들이 섬기는 여타 잡신들과 하나님은 완전히 궤를 달리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이름의 시작을 많은 학자들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찾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13,14절은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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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묻자 주신 말씀이 바로 나는 스스로 있는자니라 입니다. 그런데 이 ‘나는 스스로 있는자’ 의 번역을 영어로 보면 I am who I am 이고 워어인 히브리어로 보면 אֶהְיֶה אֲשֶׁר אֶהְיֶה – 아히흐 에세 아히흐 I am that I am 인것입니다. 여기서 I am에 해당하는 אֶהְיֶה 가 히브리어 Be 동사 이고 이 동사의 3인칭 단수형의 기본형이 יהוה 의 형태일것이고 그것이 발전해서 거룩한 네글자 즉 하나님의 이름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I am 이 하나님의 이름 יהוה 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가서 스스로 있는자 즉 אֶהְיֶה – 아히흐 -I am 이 너를 보냈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만약 I am 이라는 단어들이 나온다면 이것은 단순히 보아 넘길것이 아닙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표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예수님의 탄생 수세기 전에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한 셉투아진트 성경을 보면 출애굽기 3장 14절의 I am 을 이렇게 번역 하고 있습니다. ἐγώ εἰμι – 에고 에이미, I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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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신약성서에서 헬라어로 ἐγώ εἰμι 란 표현이 나오면 이것이 하나님을 가르키는 뜻이 있나 면밀하게 성경을 살펴 보아야 말씀의 뜻을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오늘 이 표현이 오늘의 본문의 핵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께서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하시는 그 대답의 핵심에 이 ἐγώ εἰμι 란 표현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지난번에 이어 유대인들과의 계속되는 예수님의 논쟁을 그리고 있습니다. 특히나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 직후 너의 아버지가 누구냐는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의 연속선상에서 오늘의 본문이 시작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은 바리새 인들의 질문에 대한 우리 주님의 대답입니다. 생각해 보시면 아버지가 뉘시요? 하는 질문에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 죽겠고’ 라는 대답이 좀 의외라는 것은 다들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아버님이 누구시냐는 질문에 너는 너희 죄중에 죽겠고 하면서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상식을 뛰어 넘는 대답을 하십니다, 왜 일까요?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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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물어 볼 수 있을 것 같은 이 질문에 주님께서 과하게 반응하신것 같은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질문을 하는 이유가 주님에 대해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말의 꼬투리를 잡아 주님을 잡아 넣으려는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시겠지만 간음한 여인을 잡아 주님을 테스트하고 또 세금을 가지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으냐 물어 함정에 빠지게 빠트리려 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주님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는것은 이들이 주님으로 하여금 본인의 정체성이 하나님과 연관이 있음을 이야기하는 대답을 직접 유도해 주님을 잡으려는 궤책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삼위의 하나님이심을 입으로 밝히시기라도 하면 이 곳에서는 신성모독죄를 벗어나기 힘들다고 또 이들에게서 주님의 정체성을 밝히지 않는다면 백성들로 부터 멀어지게 되고 지탄을 받게 될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나 메시아가 아니라는 식의 이야기를 주님께서 하시게 된다면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거룩한 신분을 정획하게는 아닐지라도 비슷하게는 짐작하고 있었고 이것을 주님의 입을로 말하게 해 주님을 신성모독으로 잡아넣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또 이를 두려워 한 주님께서 어물쩡 돌아가려 한다면 이를 비난해 백성들로 부터 이간질 시킬 속셈으로 계속 질문을 해 대는것을 주님께서 이미 경험으로 아시고 또 이들의 심중을 보셔서 이렇게 야단을 치시듯 거친 대답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바리새인들을 몰아부치신 직후 주님께서는 폭탄 선언을 하십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말씀을 하시는데 여기에 바리새 인들은 허를 찔립니다.

요한복음 8장2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

여기서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이라는 구절의 원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ἐὰν γὰρ μὴ πιστεύσητε ὅτι ἐγώ εἰμι ἀποθανεῖσθε ἐν ταῖς ἁμαρτίαις ὑμῶν’ 이것을 문자 그대로 영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because If you may not believe that ‘I am’ you will die in your own sins.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너희가 만약 I am을 믿지않는다면 너희는 너희 죄안에서 죽을 것이다.

당장 나타나는 번역의 문제는 이 I am을 어떤 식으로든 완결해 번역하지 않으면 번역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겨우 원어의 의미인 I am 대신 I am (he) 즉 내가 그임을 이라고 ‘그’라는 의미를 넣어서 번역을 마감 합니다.

하지만 앞에서 계속 말씀 드렸듯이 이 ἐγώ εἰμι-I am 의 의미는 너무나 분명하게 출애굽기 3:14절의 I am who I am – 나는 스스로 있는자라는 하나님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는 말이고 신약 성경에서도 이곳에서 처럼 완결적으로 사용된 곳이 없다는 것 유념하셔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께서는 자신의 신성을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표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이 의미를 놓칠 수 없도록 오해 할 수 없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이 대답이 정말 기가 막힌 것은 헬라어에서는 이 ἐγώ εἰμι 는 영어의  I am 과 같이 뒤에 수식어가 오지 않으면 의미가 통하지 않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에 ἐγώ εἰμι 를 ‘나는~~’이라는 말로 직역을 해서 해석을 할 수도 있는 또다른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번역을 하면 이 구절은 이렇게 번역이 됩니다.

‘너희가 만약 나는 ~ 임을 믿지않는다면 너희는 너희 죄안에서 죽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다시 도대체 네가 누구냐고 묻는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본인을 I am 즉 스스로 있는자로 천명을 하셨음에도 말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뭐라고 대답을 주십니까?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여기서 처음부터라고 사용된 단어는 ἀρχὴ -아르케 즉 처음으로도 해석이 되고 태초로도 해석이 되는 단어를 사용하신 대답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연 스럽게 이 대답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I am 이고 태초부터 말씀해온 하나님임을 분명하게 밝히셨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외의 세상 누가 태초부터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모든 것을 다  알지만 예수님께서 무슨 뜻으로 말씀 하셨는지 다 알지만 예수님꼐서 사용하신 말씀들이 열려있는 해석의 가능성 때문에 신성모독으로 기소를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며 분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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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들을 자세히 원어로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보다 더 분명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신성을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도 철저하게 유대인들의 덫을 피하실 수 있을 여지는 늘 남겨 두셨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예수님의 말씀과 이사와 기적의 증거를 본다면 자신들의 잘못된 생각을 뉘우치고 주님을 향해 가르침을 구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다시 나아갈 만한 충분한 여지와 기회를 주님께서 주셨음에도 절대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완고한 이유는 이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몰라서도 아니고 또 놀랍게도 우리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몰라서는 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그러나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 주님을 믿기보다는 주님을 잡으려다 보니 이들의 질문이 마치 하나님 말씀의 ABC도 모르는 자들같은 질문을 해 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가장 가까이서 누구보다도 많이 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어찌보면 주님께서 작정하시고 이들이 들으라고 성전에 찾아가셔서 말씀을 전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 결과가 우리가 잘아는 니고데모의 회심이고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지도자들의 회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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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자들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부족함이 없고 분명히 주님께 더욱더 가가이 갈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자들의 행동을 보면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들은 정치적 신앙적으로 우리 주님과 대척점에 서있던 사람들이고 이들은 우리 주님을 위험한 존재로 간주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메시아임을 알았음이 분명함에도 반대하고 모함하고 그리고 죽이게 되는 사람 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나라 비전이 이들이 추구하던 자신들의 꿈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자신들이 원하던 욕망을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 즉 하나님을 대적하고야 마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이런 일들이 아직도 일어 나고 있습니다. 죄가 없어도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는 그렇다고 힘이 없어서만도 아닌 힘이 있는 권력자임에도 죄가 없음에도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보고 또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누군가 죄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추구하는 욕망을 채우느냐 마느냐만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룰인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그런 세상의 룰에 아주 익숙하고 침잠된 종교 지도자들을 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진리를 저버린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모를래야 모를수가 없는 자들이 아무것도 못알아 먹는 귀머거리 행세를 하며 무죄하신 예수님을 모함할 기회만 찾고 또 결국 그 모함에 성공하고야 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역사를 통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이들 바리새인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고 정말로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억울한 일들이 없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모함도 모의는 먹혀들고 무고한 희생자들은 생겨 나고 세상에는 죄과 넘쳐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변명할 구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내를 세상이 맺고 있는데 그 열매가 과연 우리 주님꼐서 보시기에 좋은 열매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회개의 끈을 붇잡고 놓치면 안됩니다. 우리가 인정할 수 없을 지라도 우리의 자식인 세상이 우리의 죄를 증거 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죄를 인정하고 방관하고 또 후원한 것입니다. 그것이 자라서 종말에 우리를 참소할 우리의 원수들이 될 것이지만 우리는 그에 대항할 변명이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너희 죄가운데 죽으리라 하신 그 말씀의 뜻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되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다면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는다면 우리의 주님이심을 믿는다면 이 모든 저주의 죄와 처벌의 고리는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유일한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제발 이 죄의 시대에 우리가 우리는 저 바리새인들과 같지 않다 착각하지 않게 되기를 원합니다.오히려 반대로 정확하게 우리가 바로 저 바리새인들같은 자들이구나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는 깨달음과 지혜와 분별이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살리겠다며 교회를 죽이고 이웃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미워하는 본질적인 악이 아직도 우리안에 있음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치유받을 수 있는 진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의 시작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없이 구원없고 회개없이 천국 없습니다.

 

 

8: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8:22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8: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8: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8:2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8:26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8:27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8: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8: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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