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4:8-11

4: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4: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4: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지난번에는 하나님의 뜻을 속마음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요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순종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의 모습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과연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께 담대하게 거역을 감히 할 수 있는가 살펴 보겠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담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구절이 4장9절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그러자 요나가 대꾸합니다.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네가 옳으냐 물어보시는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질책이십니다.

니느웨성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불벼락을 맞아 다 불 타 죽기를 바라고 즐거워하고 고소해 하는 마음으로 언덕 높은곳에서 저 밑의 진노가 떨어지는 기가막힌 장면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기다리는 하나님의 선지자 요나를 향한 질책이신 것입니다.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느냐? 내 마음이 죽어야만 할 이 백성들로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알고는 있느냐? 그런 긴박한 상황에 너는 너 구경 편하게 하자고 박넝쿨이 죽은 것에 분노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의 대답이 기가 막힙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 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이 대답의 숨은 뜻은 이렇습니다. 먼저 니느웨의 인종들은 다 쓸어버려 마땅한 이방신 섬기는 족속 음란한 족속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는 우리의 원수 그러니 당연히 죽여야하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넘들이 죽는것만큼 시원한 구경거리가 없고 그 구경좀 하려고 자기 몸을 의탁한 박넝쿨이 죽어 버린것은 화가 나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즉 요나가 생각하기에 니느웨성의 파멸을 원하는 나는 맞고 이 더러운 죄인들을 쓸어버리지 않고 자비를 베풀 기회를 찾는 하나님은 틀리다는 것입니다.

나의 의가 하나님의 의보다 높고 낫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내가 더 의롭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되면 막가자는 이야기라는것 다 느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라는 사람이 하나님이 지금 니느웨 사람을 진멸하지 않는것은 옳지 않다 정의롭지 않다 그리고 그들의 구원의 기회를 주는것은 말이 안된다 라고 하나님께 대들면서 주장하고 있는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아니고 선지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대들고 하나님의 판단에 반대를 한다는 것이! 그러면서 자신의 판단이 하나님의 것보다 더 옳다라고 생각하는 이것이 이해가 가십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 지금 요나가 보여주는 태도야 말로 인간의 죄성의 축약과도 같은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건 안 믿건 누구나 다 빠질 수 있는 원죄의 굴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죄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선악과를 나란히 따먹은 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살펴 보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하지 말라는 것을 행한 죄보다 하나님을 떠나 인간이 스스로 선악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한 것이 더 큰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먹으면 죽으리라 한 열매를 보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할만도 하다고 생각하는 것.

하나님은 이것은 너희에게 극약이라고 하신것을 나는 아름답고 좋은것이라 생각 하는것, 하나님의 기준이 기준이 되어 윤리와 도덕 옳고 그른것을 판단해야 할 것을 내가 스스로 기준이 되어 나의 기준으로 옳고 그른것을 따지기 시작하는 죄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지금 한 때 하나님의 선지였던 요나의 태도를 보십시오, 나는 옳고 하나님은 틀리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것들을 다 죽여야 하나님다운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의 원죄로 기인한 인간의 죄성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결혼이라는 것 남자와 여자의 성스런 결합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간이 보기에 지들 좋은 대로 남자와 남자가 해도 되는 여자와 남자가 해도 되는 그런것으로 결혼을 재정의 해버리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순전히 인간이 자기들 좋을대로 생각한 대로 행하는 광란입니다.

이유야 좋습니다. 동성애자들 차별하지 않고 소외 시키지 않기 위해서 소수의 권익을 지켜주기 위해서…

하지만 그들의 권익을 지켜주는 방법이 꼭 그들을 결혼?시켜 줘야 가능합니까? 결혼대신 다른이름으로 같이 살게 해주고 차별하지 않을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에이즈와 같은 질병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은 역리의 성관계를 개선해 가는 방향으로 정신적 그리고 물리적 도움을 줄 그래서 종국에 치유할 방법은 어렵지만 얼마든지 가능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결혼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왜 결혼이어야만 합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제도를 파괴함으로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입니다.

남과 여의 결혼을 만드신 하나님보다 이놈과 저놈이 결혼하고 이녀와 저녀가 결혼하는 동성의 결혼이 더 고상하고 뜻이 높다라고 스스로 주장하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도가 자신들을 얽어매는 쇠사슬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실족 시킨 원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더 다루겠지만 이 올무에서 감히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요나의 모습에서 살펴 봐야 할것은 정말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는 성경의 경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뜻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으면 무엇 합니까? 순종할 마음이 없는데? 하나님의 뜻을 나의 기준으로 척하고 가늠해 보고 내가 하나님보다 더 낫다고 하는데? 말씀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는 것이 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피속에는 반역의 기질이 흐르고 있습니다. 인정하기 싫어도 오늘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께 대항하는 요나의 모습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요나의 오늘 본문에서의 모습은 정말 비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인생을 거룩한 손으로 들어 올리시고 사용하셔서 니느웨의 수많은 생명을 살리시는데 사용하셨지만 이 가여운 인간은 하나님께 크게 반역의 죄를 저지르고 하나님께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옳다고 바락바락 대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박 넝쿨하나 때문에…

인간의 의는 너무나 얇팍하고 인간의 죄는 너무나 큽니다.

오직 우리 주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가 없이는 이 거대한 죄의 씼김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하는 자들의 실족을 보고 놀라지 마십시오. 원래 인간이 그정도 밖에 안됩니다. 오직 주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권세를 붙잡을 때 우리 주님의 한량없으신 사랑을 믿으실 때 주홍같이 짙은 우리의 죄들이 씼껴지며 하나님의 임재안의 충만함과 새로와짐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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