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11:16

11:16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스가랴서가 유명한데에는 이 예언서가 우리 주님의 오심과 또 고통 받으심을 잘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스가랴 11장 1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바로 예수님을 은 삼십냥에 팔아버린 사건이 정확하게 예언 되어 있는것을 볼 수 있고 또 9장9절을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하시는 말씀에서는 정확하게 우리 주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예언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스가랴서의 11장 16절은 스가랴가 바라보고 있는 우리 주님을 버리고 다른 목자 즉 리더를 따르는데 그 리더가 어떤 자인가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는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흉포한 자를 자신들의 목자로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또 이 리더는 과연 누구일까? 생각해 보는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혹 자는 이 흉포한자가 바로 예수님을 해한 로마제국을 가리킨다고 생각 합니다. 일면 말이 되기도 하는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유대인들이 끊임없이 로마제국과 싸우고 이를 증오하고 대적한 역사를 살펴보면 로마를 유대인들의 목자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오히려 칼빈이 지적한대로 이 목자는 예수님외의 다른 거짓 영적 지도자들을 지시한다고 보는것이 맞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 가짜목자는 과연 누구를 말하는가? 예수님 당시를 지배하고 있던 수많은 제사장들과 바리사이파 인들을 생각 해 볼 수 있을것입니다. 주님을 알나보고도 배척한자들 또 엄청난 성경의 지식이 있었음에도 주님을 못알아 본 자들.

그런자들의 통치는 비록 그들이 성경말씀을 가지고 강론을 하고 또 예물을 바치는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의 자녀의 상처를 치유하는것도 아니요 오히려 강건자의 고기를 빼앗아 먹는 행위라고 스가랴 선지자는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것이 리더라도 다 같은 리더가 아니며 성경을 가르친다고 다 진리를 가르치는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현대의 이단들이나 또 동성애를 옹호하는 퀴어신학등을 강론하는 신학자들처럼 들어서 생명이 되는 말씀이 아닌 독이 되고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말살하는 악을 전하는 자들이 분명히 있고 이런것은 우리 주님의 시대에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가랴선지가 적고있는 예언을 보면 아주 놀라운 사실을 볼 수 있는데 분명하게 스가랴 선지는 이 유대의 백성들이 구세주를 버리고 그것도 은 삼십냥에 팔아버리는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세주로 오신 이를 적극적으로 열심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해 치워버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슨말인가 하면 구세주의 가치를 은 삽십냥으로 먼저헤아려서 그 돈을 치뤘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철저히 계획적으로 팔아버렸고 생명을 빼앗은 것이라는 것을 스가랴가 이미 예언하고 있는것입니다.

이 두예언이 지적하고 있는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지만 유대인들은 구세주를 버리고 이 거짓목자를 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계획적이고 적극적이고 의지적으로 말입니다.

우리와는 거리가 느껴지는 너무 악한 자들이라고 생각이 들겠지만 또 이들의 죄가 너무나 악랄 하다고 생각이 들겠지만 하지만 이들의 죄는 여러모로 우리즐의 원죄 즉 인간의 첫번째 죄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혹 자는 어떻게 꼬임을 받아 넘어간 인간의 원죄가 적극적이고 계획적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해와 같을 수가 있냐고 반문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죄로 깨어진 이 세상은 아담과 이브가 살던 에덴 동산과는 달리 언제나 경쟁과 위험과 속임수가 넘쳐나는 악한 세상으로 바뀐 것을 생각 해 본다면 아담과 이브의 죄가 단순히 유혹에 넘어갔다는 점으로 더 이해를 받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가 있습니다. 에덴동산과는 달리 우리는 언제나 유혹과 위험에 노출 된 채로 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원죄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선악과를 따먹은 그 사건으로 인해 우리에게 죄가 들어 온 사건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저 단순하게 하나님이 하지말라고 한 일을 유혹에 넘어가 저질러 버렸다라고 생각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선악과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선악과는 선과 악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의 열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그렇다면 이 선악과가 없을 때 인간은 과연 선과 악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 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아예 선과 악을 모르는 순진무구한 존재로 살고 있었던 것일까?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기전의 인간은 완벽한 선악의 구별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꼐서 이 모든 선 악의 기준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아담인 인간은 두번째 아담인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을 할 수 있었고 죄성이라고는 일도 없는 완전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존재로 창조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습이 깨어지게 되는것이 바로 선악과의 사건인데 이것은 동산의 과일을 몰래 서리해 먹은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비록 사탄의 거짓에 혹해서지만, 자기자신만의 선과악의 기준을 인간이 가지기를 원하고 바라고 열망해서 하나님의 기준을 떠나 자신만의 선과 악의 기준을 또 인생의 기준을 가지게 된 것을 의미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에덴 동산에서의 선악과의 사건의 재현이 구세주의 살해의 사건에서 동일하게 재현되고 있는것입니다. 유일한 구원의 길인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이 살해하고 자기 자신의 구원의 길을 스스로 찾겠다고 자신들의 생각으로 재단하고 오염시킨 율법을 택하고 하나님을 거부해 버린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있는 대체물을 인간이 스스로 찾으려 하는것 그것이 원죄와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려 공모한 죄를 동시에 관통하는 공통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원수 사탄의 그랜드 플랜이었다는 것입니다. 첫번 째 아담을 유혹해 실족케 한 사탄이 두번째 아담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유혹하는데는 실패 했지만 그의 백성들을 현혹해 결국에는 죽음으로 이끌어 창조주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계획을 원천 무효 시키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탄의 유혹에 인간은 너무나 쉽게 넘어가고 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탄의 마스터 플랜을 한 번에 박살낼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따라가야만 하는 유일한 생명의 길 부활의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저 주님을 고백하고 따라가기만 한다면 누구나 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기가막힌 계획 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온각 모략을 동원한 사탄의 계획의 성공이 곧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자신의 왕국의 몰락을 뜻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믿음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여는 절대 조건이 되어 버리는 것이!

 

그런데 말입니다.

비록 우리 앞에 유일한 생명의 길이 그 문이 열려 있지만 우리 인간은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하나님으로 받아 들이기 전까지는 나의 생각 나의 판단이 만들어 낸 내가 보기에 옳은길 내가 보기에 생명을 줄만한 것,  내가 보기에 아름다운 가치라는 내가 만들어 낸 허구의 목자와 우리 주님의 생명의 길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예수의 길이 아닌 내가 보기에 의로운 길 내가 생각할 때 구세주 같은 가치를 선택한 자들이 겪을 일이 바로 오늘 우리가 서두에 읽은 스가랴 11장 16절의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가 상해도 치료해 주지 않고 우리가 길을 잃어도 찾지 않으며 우리의 살을 찢어 먹을 자 그것이 우리 안의 우리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기준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우리가 보기에 그럴듯한 구세주를 좆아가는 것이 이 거짓 목자아래의 삶인 것입니다.

혹시 지금 나는 이것만 있으면 돼라고 할 만한 꿈을 쫒아 가시는 분들 계십니까? 정말로 저 사람만 쫒아가면 나도 살고 너도 살고 우리 모두가 살것 같은 사람을 발견하신 분들 계십니까? 이것만 내가 해 낸다면 나는 된다 생각하고 계신 분들 꼐십니까?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분별입니다. 이 생각이 나에게로 온것인지 하나님으로 인한것인지 구별 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며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하겠지만 이 줄밖의 세상은 속이는 곳이요 빼았는 곳이요 죽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외에 우리 주님외에 우리를 살릴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할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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