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

45:13 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45:14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45: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죄인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 봤습니다. 특별히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 선과 악을 알 게 되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이것이 하나님께서 온전한 선과 악의 기준이 되던 첫 번 째 아담의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의 상태를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게 됨으로 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깨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외의 다른것 즉 자신의 기준을 따르고 쫓아가게 되므로 심지어는 우상숭배의 죄를 짓게 된것이라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이 말씀을 나누고 많은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 보니 내가 죄인이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는데 하나님보시기에 내 가 죄인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분도 계셨고 또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죄인으로 보신다는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무겁다고 은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이런 피드백들을 받고 나서 생각해 본것은 복음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 그 복음을 생각해 봤습니다.

마가복음 일장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을 세례요한이 죄를 사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한것으로부터 보고있으며 마태복음 4장1절은 예수님의 복음선포의 시작이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라고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시작은 회개로 부터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인됨을 하나님앞에 고백하는것으로 시작 합니다. 그러니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자신이 하나님을 떠나 죄인이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 주님께 구원을 간구하는 것이 그 첫번째이라는 것입니다. 회개가 없이는 구원도 없고 복음도 백날 들어봐야 나에게 복된 소식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인으로 하나님앞에 서야할 인간인 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내가 죄인인것을 인정하는 순간 정말로 구원에서 영원히 멀어질것 같은 기분이 드는것이 이해가 됬습니다. 내가 마땅히 죄값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지만 그래도 이러저러해서 열심히 살았고 착한일도 했으니 구원의 문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런 생각에 의지하고 싶어 집니다.

그래서 오늘 나누려고 하는 말씀은 무얼믿고 나의 죄를 고백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나의 죄를 모두 고백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과연 나의 죄를 하나님앞에 고백해도 탈은 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 입니다.

정의로우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신 성부하나님께서는 죄를 처벌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누구의 죄이든 어떤 죄이든 온전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앞에 죄된것이 서있을 수 있는 자리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십자가 보혈의 핏값으로 우리죄를 사하시고 구원의 문을 여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직 주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이 가능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우리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구원의 역사의 모습과 하나님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놓친다면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벌 하고싶어 안달이 나셨는데 예수님의 심자가 보혈로 마지못해 우리의 처벌을 면해주는 그런 고약한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성경이 그리고 있는 우리 성부 하나님의 모습이 과연 그런 고약한 하나님의 모습인가요? 특히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그런 무서운 하나님을 성경이 특히 구약이 그리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가 믿고 경배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앞서 말씀드린대로 우리가 흔히 빠지는 오류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정의로우신 하나님을 넘어 무서운 하나님으로 오해 하는것입니다. 왜 이렇게 오해를 하게 되는가? 그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것이 가장 큰 이유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마치 다른 하나님처럼 따로따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하나님은 언제나 심판을 이야기 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이시고 마치 신약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받아 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 이루어진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야 말로 신약과 구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본심이시고 또한 계획이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이시며 구원임을 깨닫는다면 구약을 바라볼 때도 신약에 완성되는 그리고 우리 주님의 재림에서 완전히 완성될 구속사적 의미 언약적 의미에서 보는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런의미에서보면 구약에 드러나는 예표를 통해 하나님의 본심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예표란 하나님의 사역의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는것 즉 신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미 지난간 구약의 역사속에서도 나타나는것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Example 이라고도 하고 만약 단순히 구약에 일어났던 일이 신약에 반복된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를 나타내거나 언약적인 관점에서 연관이 있다면 이것은 Type이라고 구분이 됩니다. 이를테면 구약의 요셉은 여러면에서 메시아로 오실 우리주님을 예표하는 인물이고 하나의 Type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또 구약의 아담은 첫번째 아담으로 나중에 성육신 하신 두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이고 말입니다. 그리고 율법시대 이전의 인물이었던 아브라함과 노아는 사실상 제사당의 사역을 담당함으로 구약시대의 제사장 직분과 또 우리 주님께서 역시 담당하시는 제사장직분을 예표하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인 요셉과 그의 아버지 야곱을 통해 그리고 아담과 하나님의 관계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예화에서 우리가 종합해서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하나님의 그런 모습 속에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신뢰 할 수 있는지의 근거를 찾아 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의 모습은 요셉과 그 형제들이 요셉이 자신의 동생인 베냐민과 아버지를 너무나 염려해 스스로 베냐민 대신에 노예가 되겠노라고 자원하는 형제들의 모습에 감동해 자신의 정체를 밝힌후에 모두들 화해의 포옹을 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일만큼 자신을 미워하던 자신의 형들의 모습이 예전의 질투와 낮은 자의식에 분노에 싸여있던 모습이 아니라 아버지를 염려하고 막내인 베냐민을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하며 자기들이 대신 노예로 잡혀 있겠다 부르짖는 모습에서 세월을 지나며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은 형들의 모습에 요셉의 마음이 녹은 것입니다.

당연히 가지고 있었을 불신과 분노의 상처가 형들의 이런 모습에서 치유되고 다시 형제와 가족으로 화합하게 되는 이 모습을 성경은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중요한것은 구약의 대표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 요셉과 형제와의 화합이 말세에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에 완성될 구원의 역사를 표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질투와 음모와 살인이 남무했던 인류의 역사의 종결이 주님을 통하여 주님안에서 완전한 화해와 화합가 이루어질 것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집중하고 싶은것은 요셉이 예표하는 것과 형제의 화합이 예표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이 형제들의 아버지 그리고 요셈의 아버지인 야곱이 예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점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지금 성경에서 그려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야곱은 형인 에서의 장자권을 속임수로 뺏어가고 삼촌 라반의 집에서 기거하고 일하면서 서로 잔머리를 써서 누가 누가 더 많이 이익을 가져가나 고심하던 야곱이 아닙니다.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다 빗장뼈를 쳐맞고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을 얻은 야곱은 지금 아들을 잃은 자녀를 끔찍히 사랑하는 고령의 상처입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사기꾼 야곱이 아닌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야곱의 모습은 집나간 자식 죽은 자식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인 동시에 잃어버린 우리를 그리워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야곱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에서 비유를 드신 집나간 탕자를 그리워하는 탕자의 아버지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먼저 탕자는 집을 떠났습니다. 요셉도 강제적으로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도 탕자의 아버지도 이 집나간 아들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 아들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런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복음 15장 20절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말씀을 가만히 보면 우리가 알 수 있는것은 이 아버지가 이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들이 아직도 거리가 먼데 달려가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 올 지 모르는 아들을 이렇게 만났다는 것은 이 아버지는 매일매일 밖에서 이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가슴에 묻은 아들이지만 혹시나 돌아올 줄 도 몰라 하면서 매일매일 나가서 길을 서성이며 아들이 올만 한 길을 끊임없이 쳐다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게 말이 안되는 이야기지만 부모의 심정이 이렇지 않습니까? 자식이 죽었다고 해도 내 가슴속에 엄연히 살아있는 자식이 어떻게 죽었다고 믿어집니까? 내 가슴속에 내 자식은 엄연히 살아서 숨쉬는 이쁜 내 자식인것입니다. 그러니 부질없을 지 몰라도 매일 밖에 나가서 추워도 더워도 날이 궂어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탕자를 기다리다 까맣게 가슴이 타버린 아버지의 심정이고 또 우리를 찾고 계시는 하나님의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탕자는 솔직히 인간말종 나쁜놈입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신데 유산을 달라고 해서 그 돈 가지고 해외로 날라간 정말 나쁜놈입니다. 하지만 자식이 나쁜놈이라고 해서 어느 부모가 이 나쁜놈 내 자식도 아닌놈 하면서 모질게 굴수 있습니까? 오히려 세상이 다 나쁜놈이라고 손가락질 하면 할 수록 나만이라도 이 넘이 언젠가는 사람 될 거라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보듬고 안아주게 되 있는것이 부모의 심정 아닙니까?

그러니 이 탕자의 아버지 같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 같은 죄인들을  기다리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게다가 기다리시는데 멈추지 않으시고 직접 세상에 성육신 하셔서 우리 대신 우리의 죄를 감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절대로 불가능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서 어떤 심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지 알지 못하면 우리가 죄인이것을 알아도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돌아가신 사실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주님의 죽음의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도 없습니다. 일단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안타까와 하시고 그리워 하시고 사랑하시는 지 그 심정을 모른다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유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죄인인것을 알아도 하나님께서 직접 희생양이 되시기 위해 성육신 하셨다는 사실이 실감이 안나고 또 그렇게까지 하셔야 하는지 이해를 못 합니다.

하지만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의 문제의 해결, 우리의 거룩의 회복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다시 연합하게 되는 우리의 구원의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셨는지를 성경 전체에서 얼마나 다양하게 다루고 있는지 그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와 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시는지 이해가 깊어지지 않는다면 알기 어렵고 느끼기 어렵고 그리고 믿기 어려운 일이 됩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있는것이 신약에 이뤄진 일들을 통해 구약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신약의 역사 곧 우리 주님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하신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직접 선지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예언과 일어난 사건과 제도들을 통해 보여주신 예표들, 그 모든 것들이 우리 주님의 사역안에서 이뤄집니다. 그런데 이 이뤄진 일을 통해 보여지는 것으로 구약의 예표들을 다시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기 원하실 또다른 많은 일들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바울사도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두번째 아담임을 압니다. 그 뜻은 첫번째 아담에게 일어난 일이 두번째 아담에게도 일어 난다는 것이고 첫 번째 아담이 실패한 곳에서 두 번째 아담은 성공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두 번째 아담이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첫 번 째 아담이 완전히 실패했던 죄의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결을 하셨음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은 두 번째 아담이신 우리 주님께서 첫번 째 아담이 범죄한 사실로 인해 겪게 된 고통을 똑 같이 겪으셨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먼저 우리 주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버림 받으 셨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께서 그래도 옷을 지어 입히시고 가끔씩 아담과 말씀하신것에 비하면 훨씬 더 처절한 단절이었습니다. 얼마나 이 단절의 고통이 크셨으면 마태복음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하나님께서 주님을 완전히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님과 우리 주님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주님의 관계는 완벽한 연합의 관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완전한 연합의 관계인것인데 이 관계가 완전히 깨어 졌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류 모두의 죄를 짊어 지신 주님께서는 더 이상 하나님과 가까히 할 수 없는 버림받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무슨 말씀 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주님을 우리의 죄로 삼으셔서 우리 대신 버리셨다는 말씀 입니다. 구약에 속죄제물인 양이나 소위에 손을 얹으면 우리의 죄가 전가되어 그 짐승이 우리 죄가 되는것과 같은 이야기 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가 주님께 전가되어 주님께서 우리의 죄 자체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시고 속죄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짧은 시간동안 일어났지만 첫 번째 아담이 겪었던 사건의 순서의 반복이라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아담의 범죄가 있습니다. 이와 동일한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가 되시는 사건이 있습니다. 이 후에 아담은 에덴에서 버려지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의 관계에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완벽하게 하나님께 십자가 위에서 버림을 받으시게 됩니다. 그것이 위에서 살펴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신 듯 입니다. 그리고 아담은 죄로 인하여 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되 값을 치르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돌아 가셨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 하셨는지를 본다면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의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둘 째 아담이시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보게 되면 구약에서 아주 무섭고 단호한 모습만 묘사되어서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심정이 조금씩 보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세상에는 흑암이 임하고 돌아가셨을 때는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지진이 임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처절할 정도로 죄를 벌하고 정의를 구하시기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죄가 처벌을 받았으니 환호하셔야 할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돌아가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버림 받은 예수님이시지만 죽음을 당하면서 겪은 고통과 죽음을 격게 된 그 안타까움에 세상이 빛을 잃어버리고 지진이 일어나고 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완전한 연합의 관계에서 삼위일체를 이루시던 그 관계에서 성자 하나님이 찣겨져 나가시는 고통을 겪으신 그 격통의 표현을 하신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모습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것은 첫번째 아담이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어떤 심정을 느끼셨는 지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만드시고 보시기에 아름답게 지으신 에덴동산에 거하던 아담, 역시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에 들어가 있던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찣겨져 나온 사건이 바로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탕자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보다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그리워 하던 야곱보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로 아담이 하나님과 연합에서 찣겨져 나간것을 슬퍼하시는 맘이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받을 죄의 값을 받는것임에도 그 범죄의 결과에서 구원해주시고자 성육신 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눈뜨고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불쌍하고 안타깝고 괴로우셔서 차라리 내가 죽는게 낫지 하시고 성육신 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점을 께속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과정과 순서와 절차에 다 뜻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공무원들 민원처리하시듯이 절차 밟아서 우리를 구제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구원의 가능성이 일도 없는 큰 죄를 저지르고 스스로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떨어져 나간 악한 인간들을 첫번째 아담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아담이 떨어져 나간 그 상처가 너무나 크시기 때문에 그 고통이 너무나 크고 아담을 불쌍히 보시고 안타깝게 보시고 너무나 그리워 하셨기 때문에 절대 줄가능해야 하는 일, 즉 하나님을 배신하고 능욕한 죄인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오셨다는 것을 꼭 말씀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만큼 크셔서 이 아담이 찢겨져 나간 상처를 아직도 붙들고 계셔서, 아직도 이 죄인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고 그리워 하셔서 내 몸의 한 부분이 찣겨 나간것 처럼 구원에서 멀어지는 자들을 지켜만 보는것이 아프셔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첫번째 아담의 범죄는 스스로 하나님의 연합을 깨고 하나님으로부터 찢어져 나오게 만든 범죄 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할 아담을 단연히 죽어야 할 자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녀로써 죽음에 처하게 된 불쌍한 이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찣겨나간 그 고통을 인간을 구원해 주심으로 해결하시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로인해 아담으로인해 하나님게서는 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겪으시고 영 죽을 우리를 생각 할 때 견딜수 없어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구하시려 성육신 하셨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다 흘린 눈물로 눈이 진물러 눈이 멀어 버린 아버지 보다도 더 가슴 아파 하시고 고통 스러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 크신 사랑 이 치열한 사랑 이 끈질긴 사랑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 분만이 나를 완벽하게 사랑하시는 분이시고 그 분 만이 나의 죄의 문제를 십자가의 복음으로 해결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감히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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