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하나님께 바친 마지막 경배의 춤

삼하7: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삼하7: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삼하7: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삼하7: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삼하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삼하7:17 나단이 이 모든 말씀들과 이 모든 계시대로 다윗에게 말하니라

 

대상17:11 네 생명의 연한이 차서 네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네 뒤에 네 씨 곧 네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니

대상17:12 그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대상17:13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나의 인자를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하기를 내가 네 전에 있던 자에게서 빼앗음과 같이 하지 아니할 것이며

대상17:14 내가 영원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대상17:15 나단이 이 모든 말씀과 이 모든 계시대로 다윗에게 전하니라

 

대상 22:7 다윗이 솔로몬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대상22: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대상22:9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대상22:10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지라 그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어 그 나라 왕위를 이스라엘 위에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니

 

성경을 볼 때 정말 흥미로운 부분중의 하나는 이 본문에서는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저 본문에는 다르게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들을 만날 때 입니다.

 

만약 정말로 찬찬히 이런 본문을 들여다보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다른 기록을 허락 하셨을 까 생각해 보고 나름의 답을 얻을 수 있다면 큰 은혜가 이런 본문들에 임한다는 것을 많은 분들께서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제가 살펴 보고 싶은 부분이 바로 그렇습니다. 사무엘 상에서도 또 심지어는 같은 본문인 역대상에서도 분명하게 적고있는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을 다윗왕은 살짝 비틀어서 전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래도 명색이 다윗인데 하나님의 말씀의 골조를 건드린것은 아니고 대부분 말씀대로 전하지만 하나님의 예언에서는 다윗의 자손중 영원한 왕위를 누리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고 있는 말씀을 다윗은 꼭 집어서 자신의 아들 솔로몬에대한 예언으로 해석하고 맙니다.

 

다윗의 이런 행동을 보면서 적지않게 저는 처음에는 당황 했었는데요 왜냐하면 다윗왕이 하나님께서 “그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어 그 나라 왕위를 이스라엘 위에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니…”말씀 하셨다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것이라고 한 솔로몬이라고 하는 그 솔로몬은 말년에 우상숭배와 외국 공주들과의 주색 잡기에 빠져서 결국 이스라엘 왕국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눠지게 한 큰 이유를 제공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생의 말년을 우상숭배와 주색 잡기에 빠질 사람을 영원한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라고 하나님이 말씀 하셨다고 이야기 하다니요? 참 다윗이 제 정신이 아니구나 생각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렇게 해석하기 보다는 다윗의 입장에서 그리고 그 시대에서 생각을 해 보는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범죄한 이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의 영광을 오롯이 드러내던 청년다윗, 거인 괴수 골리앗을 하나님의 영의 힘을 입어 물맷돌로 때려 잡던 하나님의 대리자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몸을 덥히려고 수넴여자 아비섹을 동녀로 쓰며 음모와 술수에 능한 노회한 늙은 왕으로 변하고 맙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돌아보면 젊었던 시절의 나날이 정말로 눈부시게 아름답듯이 다윗이 지금은 잃어버렸을 지라도 한 때 자신이 누렸던 하나님의 영광을 약해 지면 약해 질 수록 나이가 들면 들 수록 그리워하며 하루하루 곱씹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계속해서 나라의 기초를 다지고 소위 말하는 국가 시스템이라는 것을 정비한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가 선지자 나단이 늙은 왕 다윗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에서도 감지가 되는데 밧세바와 범죄했던 다윗을 면전에서 불같이 혼내던 대쪽 같은 선지의 모습은 사라지고 선지자 나단이 다윗을 알현할 때 얼굴을 땅에 대며 절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왕의 위상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위상이 높아지고 왕권이 강화가 되었다는 것은 다윗이 왕권을 그 정도의 위상으로 높이는 국가적인 시스템을 정비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다윗왕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왕권을 사울과 같이 허무하게 망쳐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나름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다윗이 가장 힘과 정성을 쏟았던 일이 바로 성전 건축에 관한 일입니다.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 하시지 않아 할 수 없었던 일 바로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 다윗왕이 노후에 전력을 다했던 왕권강화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과 같이 아니 어쩌면 훨씬 더 힘을 들여 준비하고 있던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대상 22장과 29장을 보면 다윗이 이 성전 건축을 위해 사용할 돌과 나무와 청동과 철과 금과 은과 보석과 거기에 성전에 대한 설계도와 석공들을 준비한것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다윗이 왕권을 강화한 기록은 하지 않았어도 성전에 쓸 재료와 준비에 만전을 기하는 모습을 기록한 것은 다시 말하면 노년의 다윗에게 자장 중요한 일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왕권을 강화한 것도 이 성전을 건축할 기반을 닦기위한 일로 보일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윗은 이렇게 성전 건축에 집착을 했을까? 정작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짓는 일에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도 않으셨던 것 같은데?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무엘 하 7장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말 합니다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천막사이에 있는것을 다윗은 안타까와 하는것입니다. 다윗이 집중하고 있던 것은 성전 즉 건물을 멋지게 짓겠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할 곳을 제대로 만들고 싶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맺으신 약속의 돌 판이 들어있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귀하게 모시고 싶어하는 열망은 곧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들고 싶어한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다윗이 아무리 범죄한 이후로 하나님의 영광에서 떨어져 있었을 지라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윗의 왕국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면 망하지 않고 살 것이며 또 번영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만이 살 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성전을 지을 수 없을 지라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 성전을 지을 수 있는 마음과 능력이 되는 자신의 후계자를 고른 것입니다.

 

그런 배경을 살피고 왜 다윗왕이 나단이 전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솔로몬을 향한 예언의 말씀으로 바꾸어 말했는지 보면 그 이유가 이해가 가는데 영원한 하나님의 왕권이 임하는 왕국을 세우는데 함께 하고 싶었던 다윗에게는 이를 이룰수 있는 유일한 길이 하나님의 약속 즉 언약을 붙잡는 길 이외에는 보이지 않았고 이 언약을 붙잡는 방법으로 온 민족이 언약궤 앞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성전을 건설하는 것 이외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기만 한다면 영원한 왕권이 세워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다윗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온 민족이 언약궤 앞에 모여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거대한 성전이 필요했고 그 일을 해 낼 수 있는 자신의 자식은 오직 솔로몬만 다윗에게는 보였다고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다윗이 나단이 전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솔로몬에대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한 것은 고의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훼손이 아니라 나단의 예언을 통해 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을 통해 현실을 바라본 왕으로써의 신학적인 해석이었다고 생각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해석이 맞았는가? 는 그 이후에 역사의 기록을 통해 역대상하가 자세히 다루고 있는 주제가 됩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다면 이 모든 일이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인간의 타락의 정도는 상상을 뛰어 넘는 것이어서 그 이후의 역사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신 그 예언은 다윗이 생각한 대로 솔로몬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부정 할 수 없는 것은 이 약속을 붙잡으려는 다윗의 시도와 이스라엘 민족의 노력속에 이방인으로 가득찬 땅에서 이스라엘이 수천년을 버텨 냈다는 것입니다. 애굽과 블레셋과 앗시리아와 같은 어마어마한 왕국들이 다 사라졌을지라도 이스라엘은 남아 왕국을 지켜내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완전하진 않았을 지라도 말입니다.

 

정리하면 다윗의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면 산다라는 해석은 정확하게 맞는 해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게 하는 방편으로 다윗이 집중했던 언약궤를 모시는 성전을 통한 믿음의 강화는 결국 한계가 분명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도 영원한 왕권을 도모하는데는 실패 하고 말았구요. 그러니까 다윗이 내렸던 하나님의 예언을 가지고 내린 자신의 신학적인 판단은 대 전제, 즉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으면 산다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맞았지만 이를 따르는 각론 즉 성전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실현방법에 있어서는 틀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윗의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으려는 자세와 이를 귀하게 보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그 이후로 정말로 오랜 시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주셨고 또 이런 이스라엘 민족위에 내리신 하나님의 약속의 은혜가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시게 된 이유가 됬다는 것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또 하나님과의 약속을 붙잡기위해 아무리 뛰어 본들 이것은 한없이 부족하고 불완전한 죄스러운 몸부림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아름답지도 않은 몸짓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옷이 다 벗겨져 부끄러움이 드러나도록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한 다윗의 예배를 하나님꼐서 받아 주셨듯이 우리의 몸부림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받아 주십니다.

 

그런의미에서 보면 다윗의 성전 건축을 위한 노력과 솔로몬을 향한 기대는 다윗의 인생의 마지막에 다윗이 다시 하나님의 영광앞에서 다윗이 바친 불완전하고 부끄러운 그러나 하나님께서 귀하게 받아주신 인생의 마지막 경배의 춤이라고 할 수 있을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하나님 앞에서 다윗과 같이 불완전하고 부끄러울 지라도 흠이 많고 자랑할 것 없고 아름 답지도 않지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전심전력 최선을 다하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노래하고 뛰며 찬양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인생, 스크래치가 심하게 났고 자랑 할 것도 없고 남보기에 아름답지도 않고 부끄러울 뿐 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미련없이 바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계십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 그 해석은 매우 부끄럽게도 틀리고 말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불완전한 그의 오해까지도 귀하게 받으셔서 그의 후손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감사하심으로 받고 우리 모두가 부끄러운 것이라도 하나님앞에 모두 드리는 다윗과 같은 축복받는 인생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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