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우는 사람이 되라, 세우는 교회가 되라 (에베소서 4:17-32)

하나님께서 이끄셔서 빵과 말씀의 교회를 준비하면서 기도모임 가운데 계속해서 에베소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일장을 시작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4장의 끝을 향해 달려 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늘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크심에 감동하며 말씀을 시작 하겠습니다.

 

에베소서는 잘 알려진대로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서신서입니다. 이 서신서는 과연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과 같은 책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씀 하시는 교회는 예수님과 성도의 연합을 지칭하는 Universal Church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로마 교회하는, 지역교회와는 다른 교회를 말씀 하십니다. 즉 현실에 나타나는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는 이유, 교회의 본질에 관한 책이 바로 에베소서입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것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구원의 문제가 빠질 수 없고 그래서 에베소서는 짧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이 꼭 생각해 보고 깨달아야 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실질적인 의미 복음의 의미 또 우리의 주인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으로 인도해 주는 서신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요한 내용들이 매우 함축적으로 들어있다보니 모든 내용이 따로 따로 떨어져 있기 보다는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사고는 매우 파편적입니다. 집에서 하는 생각과 행동은 직장에서 하는 생각과 행동과 다르고 친구를 만나며 하는 생각과 행동과 돈을 두고 하는 생각과 행동과는 아예 다릅니다. 그래서 심하게 생각하면 현대인은 사회적인 자아, 가정에서의 자아, 경제적인 자아, 문화적인 자아가 다 분리 되어 있는 듯 한 삶을 삽니다.

 

그러나 에제소서의 내용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이 있게 마치 실 한줄에 여러 주머니들이 달리듯 예수그리스도라는 큰 줄기 위에 모든 내용이 달려있고 철저히 따르고 있음을 보면 일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모세 오경은 기본으로 암기해 다니면서 기도훈련 신학훈련 묵상훈련을 받은 바리새파 출신 바울의 탁월한 경험위에 성령하나님의 조명하심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 합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인 에베소서 4:25 로 4:32 은 그런즉이라는 접속사로 시작 합니다. 그런즉 이라는 말은 앞에서 설명한 내용들 떄문에, 그런 연유로 해서, 그렇기 때문에 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내가 말하는 내용을 이해 하려면은 앞에서 말한 내용을 이해하고 있어야 온전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지난 시간에 바울이 어떤 가르침을 설파 하셨는지 알아 볼 필요가 있을 것 입니다. 에베소서 4:24 은 이렇게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러니까 새사람을 입었음으로 하고 시작하는 것이 오늘의 본문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런 말이 오늘의 본문을 시작하는 그런즉이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들이 주욱 매달려 있는 구절들을 거슬러 가면 만나게 되는 3장 17절을 보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라고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결국 오늘의 본문의 시작은 너희가 믿음으로 새사람을 입었은즉이라는 말로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삼장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믿음을 끄집어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 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사도께서 거듭해서 그러므로 그런즉 하시며 말씀을 이어가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합하게 됩니까? 믿음으로 연합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에겐 소망이 있고

소망이 있는 사람은 사랑을 행할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지만 믿음 없이는 소망없고 소망이 없이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없는 소망은 거짓 소망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없는 사랑은 거짓 사랑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구원이 있으며 구원이 없으면 무슨 소망이 있으며 소망없는 관계를 어떻게 사랑하겠습니까?

 

다시 말씀 드립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지만 믿음 없이는 소망없고 소망이 없이는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 우리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없이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그런즉이라는 말은 믿음으로 새사람을 입었은즉 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말로 생각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새 사람이 되었으니 거짓을 버리라는 말씀이 오늘의 본문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중요한데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어떻게 거짓을 버릴 수 있는 가를 말씀 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거짓을 버리는 범위를 말씀 하시고 계십니다.  거짓을 버리는 범위라고 하면 그런 말이 어디 있나? 예수믿는 사람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거짓을 버려야지 어디까지는 거짓을 버리고 어디 까지는 거짓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인가? 라고 생각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오늘 말씀을 보면 말씀이 규정하시는 것이 세상에 관해서와 믿는 사람들안에 구별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을 버리라는 말씀 뒤에 나오는 말씀은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원어로 ἕκαστος μετὰ τοῦ πλησίον αὐτοῦ 즉 각자 자기의 이웃들 과는 λαλεῖτε ἀλήθειαν 진리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진리 즉 우리 주님에 대한 복음을 나룰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이웃이 누구 입니까? 바로 교회안의 주님과 연합한 우리 성도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 끼리는 참된 것을, 진리인 것, 복음인 것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라는 것이고

 

이웃이 아닌 사람들 즉 세상에서는 거짓을 버리라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끼리는 거짓을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진리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고 생명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세상의 거짓됨에 동참해 우리가 거짓을 행하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인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속에서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임을 속여서는 안됩니다. 세상 사람이나 똑 같은 행동이 나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로 나를 물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달콤하다고 착각하는 생각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속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믿는 성도들이 세상의 언어 세상이 사랑하는 것을 우리 가운데서 행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모였는데 진리와 생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의 이야기가 나오면 안될 것입니다.

 

오믈의 본문이 제시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그 정도도 못하면 믿음의 성도의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진리만 말하고 거짓을 버리는 그것, 그것도 사실 힘들고 불가능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실 영적으로 민감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위에서 살펴본 3장 17절은 적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우리의 심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게 하라고 하지 않고 계십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능력으로 거짓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으로 새사람을 입고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 심령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우리의 믿음으로 거짓을 버리라는 말씀으로 이 말씀을 받아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거짓을 버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세상에서 믿는 자의 양심을 지킬 수 있고

믿음으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살 수 있는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짓을 버린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형제와 자매들끼리는 거짓을 버리는 것으로는 만족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부어 넘치게 할 생명의 말씀들을 우리는 나눠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적어도 우리 끼리는 나눠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 안의 갈급한 영을 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멘이십니까?

 

이 말씀 후 26 절에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얼핏 생각 할 때에는 분을 내면 다 죄지. 어떻게 분을 내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나? 생각이 듭니다. 분을 내는데 어떻게 죄가 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생각을 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생각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해가 쉽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면에서 생각 해 보아야 할 것은 화를 내야 할 때에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죄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지금 북녘에서 악정에 신음하며 생지옥과 같은 삶을 살고 있고 우리 동포들을 생각해 보면 과연 우리는 지금 이들을 위한 목소리를 내고나 있기는 한것인가? 자책이 많이 되는것이 사실입니다.

 

또 악인 히틀러와 도저히 평화협정을 맺을 수 없어 분노하고 분노했던 윈스턴 처칠의 정의로운 분노는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점이지 정죄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분을 내어도 죄가 아닌 의분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성전에서 이방인들 예배 드릴수도 없게 양과 비둘기를 쌓아놓고 장사질하던 자들에게 분을 내셨습니다. 자기뿐 아니라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도 생명의 길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자들에게 주님은 지금도 분을 내시고 계실것입니다.

 

그렇다면 죄가 되는 분냄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말씀이 지시하는 죄된 분냄은 밤이 되기 까지 수그러지지 않아 마귀에게 틈을 주는 분노입니다.

 

여기서 틈이라는 말로 번역된 원어는 τόπος 즉 장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라않지 않는 분노로 인해 내 마음속에 미움이 자리잡아 마귀로 내 마음을 휘두루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귀가 내 안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분내는 것을 계속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을 내는것을 그치지 않으면 그것은 마귀에게 내 마음속에 집을 한 채 지어 주는 것과 같다는 것 입니다.

 

남편 미워하는 아내분들. 자기 인생 꼬이게 만든 사람들 저주하는 여러분들. 자기를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향한 분을 삭히지 못하기 때문에 마귀에게 자리를 내어 주면 안된다는 말씀 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분노를 자제해야 한다는 말씀 입니다.

 

어떻게 그럴수 있습니까?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내 원수요 하시는 분들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있음을 믿으신다면 나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맏기시기 바랍니다.

 

압니다. 인간은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은혜로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어려움도 내 마음에 마귀가 자리잡아 나와 내 주변의 사람에게 줄 어려움보다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결단하고 믿음의 끈을 붙들고 나의 분노의 대상대신 우리 주님을 붇들고 나아가시기 축원합니다.

 

또 이런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는 예를 들고 계신 것이 바로 28절 입니다.

 

28절은 이렇습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분을 낼 수 있듯이 사람은 넘어 질 수 있습니다. 도둑질을 한다는 것 대표적으로 넘어지는 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을 이렇게 넘어지는 데서 주저 앉으면 않됩니다.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기 전에 있던 그 자리보다 더 높게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은 뭐라고 적고 있습니까? 도둑질하는 자보고 돌이켜 가난한 자를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손으로 수고하라고 적고 있습니다.

 

남의 것을 훔쳐서 나의 배를 채우던 도덕적으로도 최저이고 자기 힘으로 일할 수도 없을 만큼 게으른 자에게 자기손으로 일하는 데서 끝나지 말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대 까지 돌이키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쯤 눈치 채셨겠지만 바로 이것이 회개의 실제적인 적용입니다.

 

다들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죄에서 일어설 때는 넘어서기 전보다 더 나아진 모습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이고 분을 내도 죄를 짓지 않는 모습 즉 죄를 지었어도 내 안에 마귀의 거처를 만들지 않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죄를 지었어도 일어나 내안에 필요한 자에게 나눠줄 만큼 선한것이 채워지는 그정도까지 일어서는 것이 회개이고 마귀에게 휘들리지 않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내 안에 채워질 선한것은 복음적인 것이어야 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어야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선한 것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명되는 복음적인 것 진리를 나누는데 어쩌면 가장 중요한 말씀을 이어지는 29절에서 하고 계십니다. 29절은 이렇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이 말씀은 오늘의 본문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합니다. 가장 적용적으로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시지만 또 그만큼이나 가장 제한적으로 이해가 되고 있는 말씀 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이 말씀은 사람들이 듣기 좋은말을 해야한다는 정도로 이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루기 어려운 사람 말이 안 통하는 사람 갈등이 있는 사람에게도 덕을 세우는게 중요하니까 말을 나이스하게 하라는 말씀 정도로 이해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저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가 되고 있고 그나마 조금 더 나가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듣기에 좋은 말 나이스 한 말만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 말씀을 종종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 말씀이 그런 의미이겠습니까?

 

이 말씀이 정말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면 적어도 두 가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것은 원어적 측면에서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말씀이 정확한지와 그리고 문맥적 측면에서 정말로 사도 바울이 말씀 하시고다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에베소서를 관통하는 주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의 관점에서 보아야 이 말씀의 정확한 뜻이 보일 것입니다.

 

먼저 덕을 세우다는 말씀은 원어로 εἴ τις ἀγαθὸς πρὸς οἰκοδομὴν τῆς χρείας 입니다.

 

영어로 직역을 하면 what is good unto the needful building up 으로 번역이 되고 한글로는 필요가 있는 사람들 즉 연약한 자들을 건축해 가는 데 필요한 선한 말을 하라는 뜻이 있음

 

먼저 이 말씀의 대상인 세워짐을 받는 사람들을 말씀은 χρείας- 즉 무언가가 필요한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언가가 없어서 서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씀에서는 언제나 단순히 믿음이 연약한 자만을 이야기 하시기 보다는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고 삶이 바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이해하시면서 말씀을 보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연장에서 세우다 – οἰκοδομή 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세우다로 번역된 원어 οἰκοδομή 는 보듬어주다 혹은 힘을 실어주다의 의미가 아니라 집을 짓는 건축의 행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건축의 행위 건물을 지어가는 행위의 뜻을 가진 이 단어는 이 말씀이 바로 앞에서 나온 건물 성전을 지어가는 비유, 모퉁이 돌 되신 주님의 비유와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 줍니다.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세워져간다는 것 입니다. 이 세워져 간다는 것은 원어로 – συνοικοδομέω의 수동형입니다. 즉 같이 세우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를 쓰고 있고 세운다는 뜻의 단어 οικοδομέω 가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장의 비유에서 사용된 단어와 사장의 말씀에서 사용된 닽어가 서로 같은 뜻을 지니고 아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이 세워져 간다는 것의 의미를 2장의 비유에 나온 세워져 간다라는 단어 연장선에서 살펴봐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2장의 건물의 건축의 비유의 핵심은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모퉁이 돌은 건물의 모든 돌의 기준으로 이보다 튀어 나왔으면 밀어서 들어가게 하고 덜 나왔으면 끄집어내서 맞추고 더 크면 깎아서 모퉁이 돌과 맞추는 그런 건축에 있어서의 절대적인 기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님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가? 나의 삶과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준과 맞추는 행위, 예수님 보다 더 나갔으면 뒤로 밀려지고 예수님보다 덜 나갔으면 따라가고 예수님보다 내 자신이 더 크면 깍여 예수님의 기준과 맞추는 바로 그것이 세워지는것의 본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준에서 보면 이 세워져 간다는 말씀이 정확하게 복음의 특질과 닮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12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두 말씀이 비슷 하지 않습니까? 하나는 내 자신이 깍이더라도 예수님을 쫓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고 이 말씀은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시는 말씀 즉 복음을 말씀하시고 계시니 말입니다.

 

이 두 말씀으로만 보더라도 성경이 조명하는 우리 인간의 모습은 이런 찔림이 있어야 쪼개짐이 있어야 깎임이 있어야 자신을 돌이키게 되는 죄된 인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의 뜻이 있어야 본문 28절에서 나온 회개, 돌이키는 삶, 넘어졌다 더 나은 모습으로 다시 일어나는 말씀과 연결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넘어졌으면 일어나야 하는데 넘어지는 아픔이 없겠습니까? 또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서기까지 힘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과정을 복음으로 내가 깎이고 또 나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가 찔리고 쪼개지는 것을 세워지는것으로 말씀 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본문을 약한 사람 쓰러지지 말라고 말을 가려서 하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에베소서와 성서의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문맥을 다 읽지 못하는 불완전한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덕을 세우다의 뜻은 연약한 사람들, 아직 복음안에 서지 못한 사람들, 죄에 쓰러진 사람들이 더 나은 모습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생명의 말씀, 복음의 말씀,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나를 조명해 주는 말씀을 전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이런 사람들에게 해 줄 선한 말이란 것은

 

절대로 복음적인 말

절대로 예수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의 말

절대로 이를 살리는 생명의 말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야만 앞에 나오는 더러운 말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이 더러운 말이라는 말의 원어는 λόγος σαπρός 입니다. 여기서 더러운 으로 번역된 σαπρός 는 부패한 썩은 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썩은것, 부패한 것은 성경에서는 생명이 없는 것, 죽은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보면 더러운 말은 나이스 하지 않고 거칠거나 음란하거나 거짓되거나 음모에 관련한 말만을 말하는 것이 라기 보다, 물론 이런것들을 당연히 포함하지만, 복음이 아닌것, 비 본질 적인것, 비 생명적인 것, 그리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에 관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이스 하더라도 예수를 대적하는 말, 듣기 좋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말, 그럴듯 하지만 거짓인 말, 저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속이는 말, 등등의 말은 아무리 듣기에 좋아도 다 부패한 말, 썩은 말인것이고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을 바울 사도께서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주안에서 나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는 말을 하라는 것이 덕을 세운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복음은 날카롭습니다. 나의 죄를 조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내 죄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어떻게 아프지 않겠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는데 어떻게 나의 초라하고 보잘것 없음을 깨닫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그 마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사랑이시듯 우리도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것입니다.

 

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진리를 말하고

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복음을 전하고

내가 살기 위해 진리를 말하고

내가 살기 위해 진리를 전하는 것. 그것이 전도자가 복음을 전하는 자세이고 그것이 오늘의 말씀이 전하시는 이 모든것을 서로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고 친절히 행하라는 말씀의 속 뜻입니다.

 

이제 빵과 말씀의 교회에 하나님께서 주신 선교적 사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의 말씀은 정확하게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참되것, 진리되는 것, 생명을 살리는 것, 예수 그리스도만 전하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묵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가 알게된 진정한 사랑으로 서로 나눠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넘어졌다 더 나은 모습으로 일어서는 회개의 삶을 사는 모습이며 덕을 세우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머릿돌로 따라가는 진정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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