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가뭄 끝에 맺히는 열매 (에베소서 5:1 -14)

0513 설교 – 에베소서 5,1-14은혜의 가뭄 끝에 맺는 열매

오늘의 본문은 크게 세 단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째는 5장1절로 4절까지의 말씀으로 사랑, 즉 믿음의 열매, 믿는 자의 열매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두 번째는 5장5절로 7절까지로 이와 반대되는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를 하십니다. 세 번 째는 5장 8절로 14절까지로 이제는 열매를 맺으라, 진리의 빛에 동참하라 하시는 명령을 하십니다.

첫 번째 단락을 들어가기 전에 열매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열매 하면 등장하는 나무는 포도나무입니다. 포도나무는 특별합니다. 사실 나무는 전혀 볼 품이 없게 생겼지만 이 열매의 맛은 과연 과일 중 으뜸이라 할 만 합니다.

단 맛, 신 맛, 쓴 맛, 모든 맛이 들어가 있는 독특한 맛이 납니다. 그래서인지 이 포도로 만든 포도주 역시 각별 합니다. 사과로 배로 술을 담글 수는 있겠지만 포도주에 대면 깊은 맛 이라곤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로 이 포도나무가 특이한 점은 이 나무는 풍요 한데서 좋은 열매를 내기 보다는 결핍한 가운데에서 좋은 열매를 낼 수 있는 그런 나무라는 것입니다.

장마철에 수박을 사서 드셔 보셨습니까? 맛이 어떻습니까? 단 맛 이라고는 없고 그저 무를 먹는듯한 맛이 나지 않습니까?

반면에 가뭄에 나오는 수박은 어떻습니까? 기가 막히게 단 맛이 납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 하시겠습니까?

장마가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풍요로움 만으로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오히려 결핍 가운데 생명을 유지해 줄 물을 바라고 강하게 찾아가는 그런 때에 좋은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포도나무가 특별 합니다.

포도나무는 특별히 각박한 땅에서 최상의 열매를 맺는 나무 입니다.

포도나무는 비가 많이 오면 뿌리가 썩어서 죽는 나무 입니다. 땅에 떨어져서 흔적도 없어진 물을 찾아낼 수 있는 갈급한 심령 같은 나무가 포도나무 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포도나무에 하나님을 믿는 백성 즉 이스라엘을 비유 하십니다. 도대체 왜 성경은 이 포도 나무에 하나님의 백성들 이스라엘을 비유 하실 까? 오늘의 말씀을 묵상 하시면서 생각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역시 지난 시간과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로 시작 합니다.

이 그러므로 는 앞에 이야기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라는 뜻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시간에 과연 바울 사도는 어떻게 말씀을 마치셨습니까?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지난 시간에 하신 말씀은 사랑의 열매를 맺으라는 권유의 말씀 이셨던 것을 우리는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의 본문의 시작을 우리는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하므로 라는 뜻으로 이해 하시면 될 것입니다.

이어서 본문은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십니까?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면 그래서 용서하는 사람이 되려면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씀 이십니까?

맞습니다. 하나님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잘 자란 자녀가 부모가 하는 대로 남을 사랑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듯 우리도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본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을 어떻게 본받을 수 있는가? 우리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본받는 다는 의미로 μιμητής 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흉내 내는 자이지만 쉽게 생각 하면 그대로 카피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카피 할 수 있습니까?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무한하신 하나님을 카피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 합니다

하지만 그런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시고자 이 땅에 보내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2절에서 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2절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여기서 이런 질문을 먼저 할 수 있습니다.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이 우리의 구원에 직결되는 것입니까? 다시 말하면 이 명령대로 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사랑 가운데 행하라는 말씀은 구원받은 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일 즉 믿음의 삶의 열매에 관한 말씀이신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이해하기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이 비유를 사용합니다.

도입부에서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성경이 비유하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포도나무는 가뭄 중에 열매를 내는 나무라고 말씀을 드린것을 기억 하실 것입니다. 물을 무턱대고 주는것이 아니라 좋은 열매를 맺을 만큼만 주는것이 중요한 나무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생각하면 포도나무는 농부의 노력이 절대적인 나무입니다. 비가 많이 오지 않는 이스라엘에서는 좋은 열매를 위해 농부가 철저하게 주는 물의 양도 조절하고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게 그러나 또 너무 넘치게 물을 받아 열매를 망치지 않도록 철저하게 조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농부가 최상의 노력으로 포도나무를 키웠음에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것은 바로 나무가  나쁠 경우 입니다.

다시 성경의 비유로 들어 갑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렘2:21)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내는데 실패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안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 모든 인류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실패는 우리 인간의 실패라는 것입니다.인간은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던 이스라엘 민족도 행위로 구원을 얻는데 실패를 했다면 우리는 말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 나쁜 종자들에게서 좋은 열매를 바라시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님께 우리를 접붙이셨다고 로마서는 말씀하십니다.  또 주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아예 이스라엘이 포도나무가 아니고 주님께서 참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리는 이제 나쁜 종자 포도나무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는 거룩한 나무 가지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이제는 거룩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참 가지가 된 것입니다. 참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님과 연합해 있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우리가 맺는 열매로 우리가 주님께 속한 사람인지 아니면 마귀에게 속한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맺는 열매,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맺는 열매를 보고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자들인가 알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께 연합해서 거룩한 주님의 생명으로 먹고 마시는 자들이 되어 있다면 주님이 좋아하시는 거룩함을 사랑하게 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을 미워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 주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바로 뒤에 나오는 구절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끝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 크신 사랑은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이런 주님의 사랑의 심령을 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의미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자들입니다. 거듭났다는 뜻의 의미가 그런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 속한 자 들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핏 값 주고 사신 주님의 종들인 것 입니다.주님께 이어져 그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로부터 생명을 받는데 주님의 성품을 안 닮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죄된 육신을 입고 있어도 주님의 모습이 비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하나님을 흉내 내는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나도 모르게 주님을 닮은 행동이 문득 문득 나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와 자매를 위해서 또 가정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일들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위한 희생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것이었다라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아들이 죽음을 맛 보게되는 험하디 험한 길을 가셔야 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의 아들 성자 하나님의 희생을 향기로 받으시는 우리로는 상상도 못할 넓이와 높이와 깊이의 사랑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 안에 우리 주님 안에 속한 우리 가운데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의 모습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접 붙혀진 가지가 본 나무와 융합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듯 우리의 죄성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입은 육신에 죄성이 다 사라지는데 시간이 필요하고 또 언제 다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분명한것은 우리가 주님안에 거하게 되면서는 죄를 저지르고 또 죄된 행동, 생각이 나는 것 조차도 못 견디게 싫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주님의 편에 서서 죄와 싸우는 거룩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거룩한 싸움을 싸우는 성도들에게 그저 이런 죄를 미워하는데서 멈추지 말고 성령께서 주장하셔서 죄를 미워하게 된 이 위에 더욱 더 힘을 다해서 죄를 끊어 버리도록 노력을 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마땅한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거룩한 성도들에게는 어떤 것이 어울리지 않는것인가? 사도 바울은 먼저 언어의 문제를 들고 있습니다. 죄성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언어의 문제를 바울 사도께서 다루라고 하신것은 많은 것을 이야기 해 줍니다. 죄는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고 하시고 또 누추하고 어리석고 희롱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누추한것으로 번역된 αἰσχρότης 는 부끄러운 것이라는 뜻의 원어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부끄럽습니까? 과연 무엇이 부끄러운 것입니까? 주님과 같이 할 수 없는 더러운 모든 것들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죄 된 것 생명 없는 것 우리에게 불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부르는 말들을 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하고 하십니다. 어디에서 이런 감사하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어디서 이런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까?

바로 주님과 연합하여 주님으로부터 얻게 되는 생명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곧 감사는 우리 주님과의 연합에서, 하나님에게서 오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는 주저 말고 그 마음을 붙드시고 그 감사의 마음 생명의 마음을 입술로 선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소해 보입니까?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의 죄를 벗어난 삶의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의 선포, 죄를 끊어 버리고 더욱 더 하나님과 가깝도록 우리를 이끄는 비밀한 힘이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맺는 사랑의 열매의 첫 걸음이 될것입니다.

아내에게 감사하는 남편이 사랑의 열매를 맺지 않겠습니까?

자녀에게 감사하는 부모가 사랑의 열매를 맺지 않겠습니까?

부모에게 감사하는 자녀가 사랑의 열매를 맺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반대로 아내에게, 자녀에게 또 부모에게 불평하는 자들이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감사는 사랑의 열매의 마중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말씀 하셨던 성도의 믿음의 열매인 사랑에 대해 대척점에 서있는 행위 곧 우상숭배가 무엇인지 말씀 하시기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시작하시는 말이 이렇습니다 “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사람들 귀에 듣기 좋은 말로 달래고 어르면서 우리의 죄성을 다루지 않으십니다.

이방인들의 교회이었던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 지금은 주님께 돌아와 성스런 삶을 살고자 하지만 이들 모두는 음란하고 폭력적이며 탐욕넘치는 삶을 살던 이방인 들이었습니다. 그런 너희들이 모를리가 없겠지만 이라고 말씀 하시면서 바울 사도는 우상숭배의 문제를 바로 다루기 시작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우상 숭배의 문제로 첫 번째로 꼽으신 것이 음행의 문제입니다. 이 음행이라는 것은 차마 설교시간에 다루기 어려운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만 도대체 어디까지가 정상인 것이고 어디부터가 음행인 것인가? 다루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습니다.

음행하는 자라는 원어는 πόρνος  하는 단어입니다. 현대에도 비슷한 단어가 음란한 죄를 나타내는 뜻으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뜻에 있어서는 고대 헬라어는 조금은 다른의미에서 씌여집니다.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남자로 성을 파는 창남들을 이야기 하는 단어이면서 동시에 음란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했습니다.

남자는 당연히 일을 하고 그 수고로 자신과 가족을 먹이는 것이 남성이라는 정체성의 모습이었다면 이 단어가 나타내고 있는 모습은 자신의 성을 팔아 살아가는 남성의 행위를 음행이라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행의 기준은 이렇게 생각 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이 훼손되는 정도로 성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일하는 정체성을 잃어 버릴 정도로 성적인 것에 도착된 상태를 뜻하는 것이 음행의 기준이라는 것은 남자가 갖춰야 할 당연한 모습과 덕목을 성적인 이유로 잃어버리는 것을 음행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적인 이유로 시간과 돈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나의 삶의 패턴이 바뀌기 시작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음행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말씀하시는 문제는 더러움의 문제입니다. 성적인 음행도 더러움에 속하겠지만 바울 사도께서 여기서 지적하시는 더러움이라는 원어는 ἀκάθαρτος 라는 단어로 많은 것들이 혼재된 상황을, 섞여있는 모습을 가르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모습만이 아닌 다른 것, 즉 세상적인 모습이 섞여 있는 것을 더럽다 라고 하시는 것을 이 단어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통하던 술수를 교회에서 쓰는 자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과 세상에 대한 생각이 섞여 있는 자나 하나님 나라를 원하는 마음과  세상의 화려함을 동시에 사랑하는 마음이 섞여있는 그런 마음을 더럽다라고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세상 가운데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갈피를 못잡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들 자기가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아니라 언제든지 세상의 지혜를 좇아 세상사람처럼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이 더러운 부류에 속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하시는 문제는 탐욕의 문제입니다. 탐하는 자 원어로  πλεονέκτης 는 이미 가지고 있는것이 많은데 더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명에 의해서 자신의 마음속에 이러 이러한 기업을 만들어야 겠다라는 사업가 정신이 생긴 그래서 밤낮으로 노력하고 뛰는 사람들이나 지금 있는 것으로 미래에 있을 필요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를 대비해 열심히 준비하는 사람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으로도 충분하고 이 보다 더 무엇을 갈구할 이유가 없는데도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해 혹은 그냥 타성으로 돈이 좋아서 돈이 이미 삶의 기준이 된 이유로 충분히 가지고 있는데 더 가질 이유도 없는데 더 더 더 원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탐욕의 문제는 비단 돈의 문제 물질의 문제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예의 문제에도 해당할 것이고 인간 관계의 문제에도 해당할 것입니다.

관계를 독점하려고 하거나 지위를 독점하고자 하는 그 마음 다 탐욕의 죄입니다. 이런 독점욕에 싸인 지도자들이 어떤 식으로 멀쩡하고 살기 좋던 나라를 생지옥으로 만들었는지는 이런 탐욕의 마음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일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이런자들을 우상숭배자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그러니까 위에서 이야기한 음행과 더러움과 탐심의 문제는 단순한 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그러니까 구원받은 자들인지 아닌지 나타내는 예표와 같은 역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죄들을 저질러서 구원을 받지 못 하는것이 아니고 이런 죄를 저지르는 자들 특히 주님 믿는다 하면서 교회 나오고 예배 드리면서도 이런 죄를 저지르는 자들은 이미 이들의 마음을 진리이신 우리 주님께 드린자들이 아니고 죄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악을 행하는 자들이므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의 주인이 이미 원수 마귀이기 때문에 이들의 열매가 음행과 더러움 탐욕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주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잘 안다고 하지만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제 내 마음속에 탐욕의 마음이 망령된 생각이 또 욕정의 생각이 들어올 지 모르는 연약한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악한 생각들에 휘둘리더라도 우리는 절대로 이런 악한 생각에게 우리 마음속에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루터도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머리위로 새가 지나가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머리위에 둥지를 짖게 두는것은 죄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래서 실족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실족이 우리의 파멸로 이어지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바울은 제일 중요한 것으로 드는것이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러한 생각과 행동들 즉 우상숭배를 옳다고 속이거나 좋다고 속이지 못하게 하라 라는 지극히 당연 하신 말씀이신 것입니다.

현대의 수많은 이단들과 성적인 모럴의 해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바로 이런 영적인 문제에 있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고 돈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되고 또 동물과 어린아이까지도 성적 대상으로 보고, 한 사람과의 결혼이라는 결혼 제도의 근간도 깨려는 악한 생각이 엄연하게 존중되어야 할 사상이나 생각으로 자리잡고 있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바울 사도의 이런 경고의 울림은 너무나 큽니다.

바울사도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런 생각을 퍼트리는 사람들, 이런 행동에 빠져 음행과 더러움과 탐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다가 우리 마음속에 더러운 생각이 들어오고 자리를 잡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정하고 싶어도 그것이 사실입니다. 신실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가 들어가서 나라를 민족을 우상숭배에 물 들이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죄에는 전염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은 이러한 악한 생각들을 경계하는 것과 동시에 주변에 이런 죄에 동참하는 자들이 없게하고 또 그런 생각과 말과 행동이 넘치는 곳에서는 피하시길 축원드립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께서는 이런 강한 경고의 말씀뒤에 우리에게 그런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연약함 그리고 우리가 원래 빠져있던 악함에 대한 재확인을 한 후에 우리가 그럼에도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하시는 말씀 이십니다.

앞에서는 우리가 주님을 믿기 전에 알고 또 모르고 빠져있던 우상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는 말씀은 우리가 바로 어둠에 속하여 있던 그런 악한 존재들이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그러한 악함이 이제는 우리 주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은혜로 바뀌어 빛에 속한 자들, 생명에 속한 자들로 바뀌었다는 말씀을 바울 사도께서 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거대한 사건에 대한 구구한 설명이 없이 곧 바로 이젠 어둠에 속한 자들, 우상 숭배자들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한 그 기가 막힌 사건에 대해 구구한 설명도 없이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본론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정말로 어마어마한 일은 설명을 거부 합니다. 기적이 설명이 가능하면 기적이 아니듯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대속의 희생은 인간의 수준에서는 검증도 이해도 불가능한 신비의 영역인 것입니다.

오히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제는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고 그렇게 우리의 정체성이 바뀌었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깨닫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단도직입적으로 우리에게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하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생명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크리스챤으로 행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크리스챤으로 행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바울 사도는 너무도 분명하게 우리의 행함은 우리가 빛의 자녀로 구원 받은 결과로 그 후에 나타나는 구원의 열매 우리의 변화의 열매 곧 믿음으로 인한 구원의 열매임을 분명하게 말씀 하시고 계십니다.

바울 사도는 말씀 하십니다.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여기서 말씀 하시는 착함은 이 사람이 이 얘기하면 허 하고 저 사람이 이 얘기 하면 하 하는 무골호인같은 착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착함은 바로 뒤에 나오는 의로움 공의로움과 같이 갈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착함은 원어로는 ἀγαθωσύνη 로써 선과 악을 말할 때의 선함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 앞에 굴하지 않는 선함이며 폭력앞에 비폭력 무저항으로 맞섰던 선함입니다.

즉 그뒤에 나오는 의로움 곧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같이 갈 수 있는 선함이라는 것입니다.

또 마지막으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로 바울 사도께서  말씀 하시는 것은 바로  진실함, 원어로는 ἀλήθεια 곧 진리의 삶을 사는것을 이야기 하십니다.

이 모든것이 다 마찬가지이지만 특히나 이 진리의 삶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가 살 수 없는 맺을 수 없는 열매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진리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바울 사도의 권면을 잘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책망을 받는 것마다 빛으로 드러나고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책망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진리의 빛이신 하나님의 책망이 빛에 속한 것일지 어둠에 속한 것일지 죽이는 것일지 살리는 것일지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그 책망조차도 진리의 빛이고 살리는 생명의 역사인 것입니다.

어둠에 속하던 것들로 진리의 빛을 비추사 빛의 세상에 속하게 하시는 것이고 썩을 육신의 가지로 죽을 우리를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 붙이사 영생을 누리는 생령으로 바꾸시는 것이 하나님의 책망이십니다.

빛이 없는 흑암이 어떻게 밝음을 이해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흑암에 빛이 비추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흑암이 아니라 빛이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밤은 동이 틀 때까지가 밤입니다. 동이 트고 나면 밤은 사라지고 아침이 되는것과 같이 하나님의 생명의 빛으로 책망을 받아 하나님 앞에 그 생명의 빛 앞에 진리의 빛 앞에 서게 된 우리는 더 이상 어둠에 속한 자 일 수 없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이 생명의 빛 진리의 빛에 속한 줄 모르고 죄의 어두움을 심령에 품고 사시는 분들 계시면 분명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비추워진 자는 더 이상 어두움일 수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접 붙혀진 자는 절대로 어둠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아직은 부족 하더라도 결국은 생명의 열매 하나님께서 향기롭게 받아주실 그런 열매를 맺고야 마는 것입니다.

과연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인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더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신실 하심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께 붙어 있기만 한다면 역사를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신실한 농부가 포도원을 가꾸 듯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도록 가꾸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고 그 믿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바칠 만한 열매가 나에게 맺힐 것 입니다.

또 은혜의 결핍 가운데 어려운 시절을 보내시는 분들 계십니까? 좋은 포도나무의 좋은 열매는 장마 때 맺히지 않습니다. 진짜 좋은 열매는 은혜의 가뭄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타는 목마름으로 간구하는 간구의 시간 끝에 맺힌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아픔 속에 나의 고통 속에 간절히 바라던 하나님의 은혜는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로 맺게 하실 열매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가치는 하나님께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가 하는 은혜의 풍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결핍가운데서도 은혜의 은혜를 구해 결국 나로 열매로 맺어내는 하나님의 손길에 있음을 깨달으시고 이 열매를 맺기 위해 은혜에 은혜를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열매 맺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은혜로 받은 구원만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부족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으로 거듭난 증거인 우리가 맺을 성화의 열매, 믿음의 열매, 성령의 열매에 있습니다.

이 열매는 바울 사도께서 말씀 하시는 에베소서에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리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열매는 은혜의 풍성함 뿐 아니라 은혜의 가뭄과 같은 어려운 시간을 지나가며 하나님의 은혜를 생명을 진리를 간절히 구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귀한 상급인 것입니다.

이 열매는 하나님의 진리의 빛앞에 나의 죄된 과거를 비춰보았던 그래서 책망을 받았던 그래서 빛으로 변화되었던 회개의 인생만이 맺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풍요가운데도 생명의 결핍으로 죽어 가는 것이 바로 영적인 존재인 인간의 숙명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우리는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도, 세상에 죄악이 범람하는 가운데에도 쓰러져 무너지지 않고 일어나 진리의 빛 생명의 빛을  발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쏘여진 자들의 운명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 붙혀진 하나님의 자녀들의 운명임을 믿으시길 축원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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