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안을 뜨고 사는 삶. (엡 5:15-21)

 

오늘의 본문은 시작부터 끝날 때 까지 영적인 안목을 강조 합니다. 영적인 분별을 하도록 권유를 하는 본문이 바로 오늘의 본문 입니다.그런데 과연 어떤것이 영적인 안목이고, 영안이고 영분별이고 영적인 삶을 사는것인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분별을 하는것을 영안으로 본다라고도 하는데, 영안이라는 말은 분명히 성경적인 말인데 참 잘못 사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영안이라는 말이 성경적이라는 이유는 성경에는 보라 혹은 눈을 뜨다라는 뜻의 말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 들의 뜻이 많은 경우 영적으로 보라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본다는 것은 영안으로 보라라는 말일테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종종 영안으로 본다는 것을 마치 미래를 본다든지 저 사람의 죄를 본다든지 귀신을 본다든지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은사와 영안을 착각하는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아람왕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포위하고 있을 때 엘리사의 기도로 눈이 열려 천군 천마를 보는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지 성경이 특히 신약에서 말씀하시는 영안의 경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의 해야 할 것은 성경이 영적으로 보라 분별하라 하고 이야기 하실 때에는 그 말을 듣는 대상이 특정한 개인이라기 보다는 믿는 모든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반대로 모든 성도들이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 임과 동시에 모든 성도가 영적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볼 수도 없는 사람들 보고 보라 라고 명령 하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은사는 받은 사람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용도에 따라 다른 은사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앞서 말씀 드린 특별한 능력들은 지식의 은사나 영 분별의 은사등으로 생각을 해야지 이것을 영안이 열렸다든지 하는 식으로 이해하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영적으로 보는 것과 혼동을 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보는것은 모든 성도가 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영적으로 보는것, 영안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또 오해를 하는일 즐 중 하나가 이런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나 능력에 무슨 큰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 모두와 교회의 충만한 은혜를 위해서 모두에게 허락하신 영적인 안목과 몇몇 사람들을 들어 쓰시면서 교회의 사역을 돕기 위해 부어주신 특별한 은사 중에 무엇이 더 귀한 것입니까?

 

저는 둘 다 귀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하지만 굳이 들자면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영적인 안목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니 오늘의 말씀을 보시면서 이런 신비적이고 은사적인 의미로의 영안을 생각 하시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세 허락하신 영안 당연히 믿는 사람으로써 사용하여여 할 믿는자의 능력으로의 영분별의 능력을 염두에 두시고 본문을 대하시면 좋을것이라 믿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드린대로 영안에 대해서 입니다.

영안으로 주목해야 하는 대상에 관해서 말씀하시고

영안으로 분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나오며

그리고 그런 결과가 어떻게 드러나는가가 나옵니다.

 

그런데 본문을 유심히 읽어 보신 분들은 눈치를 채셨겠지만 오늘의 본문에는 영안이라는 말도 눈을 뜨라는 표현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오늘의 본문이 영안에 관한것 이라고 말씀을 드리는지 의아해 하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한절씩 짚어 가면서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도 그런즉 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앞에 바울 사도께서 끝맺음을 하시던 말씀과 연결이 되는 시작을 뜻하는 것인데 지난 끝시간의 주제였던 열매를 맺는 삶 즉 열매를 맺으려면 이라는 말씀으로 바울 사도는 오늘의 본문을 열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하시기를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하시는데 여기서 ‘주의하여’라고 번역된 단어가 눈으로 보다라는 뜻의 βλέπετε 입니다.

 

이 말은 영적으로 보다라는 뜻으로 성경에 두루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영안으로 봐야한다라고 하신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수식하는 말이 엄정하게, 아주 주의 깊게, 라는 뜻의 ἀκριβῶς 입니다.

 

그러니까 영의 눈으로 보는것도 대충 보는것이 아니라 아주 엄정하게 분별하면서 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정하게 분별하면서 관찰해야 하는 대상이 무엇이라고 성경은 적고 있습니까?

 

바로 우리자신들이 어떻게 행하는 지 엄정하게 분별하면서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어떻게 행동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말하는 지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보면 우리가 과연 하나님 뜻에 맞게 가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면서도 탐욕의 죄, 폭력의 죄 미움의 죄 음란의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죄에 빠져 있는지도 모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죄를 저지르기 전에 이미 우리가 죄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우리를 잘 살펴보면 알 수 있고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럴 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삶을 돌이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 하시는 회개의 뜻 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지혜있는 자들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지혜있는 자들은 남들을 보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지혜있는 자들은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는라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대신에 자기 자신이 어떻게 행하고 있는가? 특히나 내가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점검 합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자신이 스스로 이정도면 괜찮다는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맞춰 남들과 끊임 없이 자신을 비교합니다.

 

남들보다 자기가 못하다고 느끼면 죽을 것 처럼 괴로와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가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낫지 하면서 자기를 위안하는것이 어리석은 자들의 특징 입니다.

 

내가 죄인이지 하다가도 그래도 내가 저 인간 보다는 낫지 하면서 위안을 삼는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적어도 나라는 인간이 저 사람보다 선한면이 있는것이, 잘 난 면이 있는것이 왜 중요한 일이 아닙니까?

 

죄의 문제에 있어서, 영적인 관점에 있어서 중요한것은 이 죄인이 저 죄인보다 조금 덜 죄를 지었다가 아니라 죄인인가 아닌가? 이기 때문이고 우리 주님을 만나 죄의 문제의 해결을 받았는가 이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내가 조금 더 낫다는 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되지않는 생각해 봐야 시간만 아까운 시간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는 그래서 지혜있는 사람은 쓸 데 없는 것에 집중해 기회를 탕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월을 아끼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 세월을 아낀다는 것이 단순히 시간을 잘 활용한다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시간이라는 단어가 원어로는 καιρός 즉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원어가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가 아닌 이 카이로스를 사용하므로 이 구절이 뜻하는 바가 좀 더 심오해 집니다.

 

단순히 시간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아낀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아끼다로 번역된 ἐξαγοράζω 는 모든것을 활용하다, 주어진 가치를 다 활용 한다는 뜻 이 있는 말이기 때문에 이 구절을 다시 번역하면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전부 다 활용한다는 뜻 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인생에 기회를 갖고 싶어 합니다. 게다가 그 기회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갖게된 기회를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날려 버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귀한 기회를 붙잡기 위해 말씀은 무엇을 하라고 가르치십니까?

 

영안으로 자신이 행하는 것을 철저하게 살피고 조심하고 분별하면 누구나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때 즉 기회를 붙들 수 있다고 말씀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더욱 우리가 그렇게 해야할 이유로 때가 악하다고 하시는데 이 때라는 단어는 세대로 해석할 수 있는 ἡμέρα 라는 단어를 쓰고 있으니 이 세대가 악하니 우리들의 말과 행동을 엄정하게 영적으로 분별하고 조심해서 하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붙들 수 있다는 말로 우리는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악한 세대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말씀드릴 기회를 하나님께서 허락 하여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적으로 분별을 하고 하나님이 허락 하신 기회를 얻고 난 후에 오게되는것으로 말씀이 적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7절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어리석은 자는 누구 입니까? 세월을 낭비하는 자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잃어 버리는 자 입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자가 아닌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세월을 아끼는 자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붙드는 자입니다.

 

그런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을 얻게 된다고 말씀을 적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고 말씀은 적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것이 아닐까? 알아야 뭘 하는 법인데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아야 하나님의 때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기회를 붙들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상식적으로는 그렇게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잡는 것 뒤에 놓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우리의 말과 행동을 영적으로 분별해서 다스리고 그러고 나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고 그러면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때와 기회를 잡을 수 있어야 맞을 것 같은데, 말씀은 오히려 영적으로 분별하는 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때와 기회를 붙들 수 있고 그러고 나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고 적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씀은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까?

 

첫 째 하나님의 뜻은 우리같은 인간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가지기 때분입니다.

 

이사야서 55장 9절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같은 피조물이 어떻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다고 하는 계시를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계시란 것은 우리에게 밝혀 보이신다는 뜻으로 도무지 우리의 수준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알 수 있도록 밝혀서 보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시가 없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 맞는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어차피 크고 높으신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알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면 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 답은 이 이해라는 말에 있습니다.

 

이 이해라는 말은 συνίημι 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말은 다같이 라는 συν 이라는 말과 보내다 혹은 세우다라는 뜻의 φίημι 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같이 합쳐서 세우다라는 뜻이 되는 말인데 이것이 이해하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법이 어떤것인가 알 수 있습니까?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는 비밀은

 

 

우리에게 허락 하셨던 하나님의 때 기회들을 통해 반복해서 알려주신 즉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뜻을 다 모아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방향이 무엇인가 깨달아가게 하시는 그런 것이라는 말씀인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안을 번쩍 뜨게 되자마자 하나님의 뜻이 척척 이해가 되는 그런것이 아니고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순간 순간 계시로 경험 시키셨던 하나님을 경험했던 그 기회들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그 경험들을 다 통틀어 가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줄 깨달아 가며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뜻이 과연 무엇인지 깨달아 가는 것이란 것이 바울 사도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엿볼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비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먼저인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또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그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게되고 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찾기전에 나를 찾아와 나를 만나주신 주님!,

내가 죄중에 있을 때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

내가 구렁에 빠져 있을 때 나를 건져주신 주님!,

나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신 주님!

 

이런 주님을 먼저 만나는 경험들이 켜켜이 쌓여야 하나님의 그 크신 뜻을 느끼게 되며 이해하게 되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안이 뜨여진 크리스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이 나는 한 믿음의 선배가 계셨습니다.

 

그 분은 바로 고 옥한음 목사님 이셨습니다.

 

옥한음 목사님은 평생을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키우시는데 전념하시는 삶을 사시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신 목사님이셨습니다.

 

특히나 그분의 예수에게 미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광인론은 아직도 많은 후배 목회자들에게 영향을 크게 주고 있는 현장 목회의 지침과 같은 목회 이론 입니다.

 

그분의 주장인

 

복음에 미치고

양육에 미치고

비전에 미치고는

 

이 세가지에 미쳐야 제자를 양육 시킬 수 있다고 하는 목회이론은 실제로도 복음에 미치고 양육에 미치고 비전에 미치고 즉 예수 그리스도에 미쳐서 한 평생을 살아간 옥한음 목사님의 삶과 목회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더 울림이 크고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위대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평생을 일관성을 가지고 살지만 꼭 자신의 일관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 부분이 있듯이 고 옥한음 목사님도 삶의 끝자락에 이해가 어려움 말씀을 하시기 시작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내가 목회를 잘 못 했다는 자책입니다.

 

이런 말씀은 정말로 얼토당토 않게 들렸던것이 목회를 하면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모시던 사람들 조차도 옥한음 목사님의 삶의 진짜 모습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데 걸림돌이 되거나 자신이 시험에 들거나 한 적이 없다고 다들 고백하는 그야 말로 살아있는 성자와 같이 살아오신 이 목사님이 자신의 목회를 실패한 목회로 생각하고 괴로와 하셨다는것이 이해를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까?

 

성도들이 다들 사랑하시고 또 존경하는데 그리고 자신들의 삶의 모범으로 삼는 그런 위대한 목회자인 이 옥한음 목사님이 자신이 실패한 목회자다 라고 생각하시고 괴로와 하셨다는 것이 이해가 가는 이야기냐는 것입니다.

 

저는 이말씀을 이 영적인 거인의 겸손으로만 받아 드렸지 왜 이분께서 그렇게 말씀 하셨는지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이 말년에 하셨던 이야기를 듣고 왜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기 시작 했습니다.

 

그것은 옥한음목사님께서 사람이 에너지가 100 이라면 70만 써라라고 후배 목사님께 하셨다는 충고를 듣고 나서입니다.

 

그 후배 목사님은 옥 목사님의 이 말씀이 젊었을 때 몸을 아껴야 나이 들어 고생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으로 받으신것 같았지만 저는 이 말씀이 아주 다른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그것은 이 위대한 영적 거인이 삶을 되돌아 보았을 때

 

인생의 어느 부분에서 자신의 힘을 100을 써서 하나님 대신 자기가 일을 한 부분이 있었구나 하고 느끼신 것이 아닐 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에 미치고 예수에 미쳐서 살았지만

 

인생의 어느 부분에 하나님보다 내 힘으로 앞서 나간 부분이 있었구나 하는 자책을 하시고 자신의 목회를 엄격하게 영적인 눈으로 바라 보신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후배 목회자들에게 너희들이 다 하려고 하지 마라 힘은 70만 쓰고 나머지 30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데 바쳐라라고 말씀 하시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옥한음 목사님이 정말로 본인께서 고백 하시듯 실패한 목회를 하신 분이십니까?

 

전혀 아닐것입니다.

 

오히려 고인의 내가 목회를 잘못했어, 내가 하나님 젖혀놓고 내힘을 100을 썼어 그게 잘못됬어 라고 하시는 자책은 돌아가신 목회자 옥한음의 위대함을 더 돋보이게 만드는 증거지 흠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인의 그러한 자책과 반성은 정말로 이 목회자가 하나님앞에 서있는 한 인간으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한 인간으로 정말로 내가 주님이 부르신 그 모습으로 잘 서있나 끊임없이 그리고 너무나 엄정하게 영적으로 자신을 비추어 보는 그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언젠가는 모두 다 하나님의 앞에 다시 서게 되어 있습니다.

 

현대 의술이 발달해서 이제는 사람이 백이십세 까지는 산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는 이 땅위에서 백이십년을 보내고나면 그 후에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게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옥한음 목사님의 말년의 이런 자책어린 고백은 하나님 앞에 다시 서시기 전에 본인을 자신이 스스로 영적으로 철저하게 조명하고 주님앞에 또 성도와 교회앞에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남겨줄 것은 남겨주는 그런 과정을 목회의 시작부터 하늘 나라 가실 때까지 놓치지 않으셨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이것과 똑 같은 정말 중요한 거룩한 비밀을 말씀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의 시작은 우리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복음의 기준으로 엄정하게 영적인 눈으로 분별해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옥한음 목사님의 삶은 우리가 우리를 영적으로 분별하는 이 일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이 땅에서 부어주시는 한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되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잘 해내야 우리가 주님 앞에 잘 설 수 있는 하나님께 상금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종이 되는 길이라는 것을 삶으로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 만큼 중요한 일이 오늘 바울 사도가 말씀 하시는 영안으로 나를 엄정하고 철저하게 검증해 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세 주신 소명을 다하기 위해 전력을 다 하고 계십니까?

 

나에게 허락된 에너지의 70을 소명을 위해 쓰시고

 

나머지 30은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는 그 시선으로 나의 행동과 말과 생각을 영적으로 분별하며 엄정하게 살펴 보시길 축원 드립니다.

 

그렇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잡을 수 있고 그 기회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가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시작,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거룩한 기회를 붙잡는 일, 그 거룩한 하나님의 사역이 우리가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영적으로 엄정하게 분별하는 일 부터 시작 됩니다.

 

자신의 영적인 민 낯을 쳐다 보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내가 그래도 괜찮은 인간이라고 위안 하고 살던 그 착각을 벗겨 버리는 일이 쉬운 일일 수 있겠습니까? 영적으로 나를 거룩하신 주님앞에서 조명받아 보는 일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십자가가 무슨 의미인지 왜 나에게 복음이 필요한지 주님의 보혈이 필요한지 깨닫고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찾지 않겠습니까?

 

주님앞에 무릎을 꿇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아직도 우리를 위해 보혈을 흘리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의 이마에 보혈로 써주시는 새 이름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소명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하나님의 이름을 전심으로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주님께 힘을 받아 세상을 승리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주님께서 안심하시고 능력을 허락 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에 집중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지혜있는자와 같이 깨어 나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영으로 분별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이 됩니다.

 

나의 초라하고 죄된 모습으로도 덮을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그 역사가 바로 여기서 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세 주신 소명을 다하기 위해 전력을 다 하고 계십니까?

 

나에게 허락된 에너지의 70을 소명을 위해 쓰시고

 

나머지 30은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는 그 시선으로 나의 행동과 말과 생각을 영적으로 분별하며 엄정하게 살펴 보시길 다시 한 번 축원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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